대중국 무기 금수 해제 둘러싸고 ‘정면 충돌’
한때 둘도 없는 우방이던 미국과 유럽이 사이좋게 지내기는 틀린 것 같다.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강행에 반기를 드는 바람에 소원해졌던 유럽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최근 유럽을 순방했지만 ‘중국 문제’라는 복병을 만나
신통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거대한 중국 시장에 잔뜩
눈독을 들여온 유럽은 양측 관계 증진의 주요 걸림돌인 대중국 무기 금수 조처를 몇 년 전부터 무력화하려고 애썼다. 특히 이번 기회에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 조처를 확실히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미국은 그럴 경우 중국과 타이완 간 군사 균형이 깨진다며 유럽 쪽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순방 이전에도 이 점을 강조하며 유럽 쪽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입장 차만 확인했다.
유럽은 이르면 오는 6월쯤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 조처를 전면 해제할 방침이다. 중국에 대한 금수 조처는
1989년 중국 정부가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데 따른 일종의 경제 제재였다. 그러나 당시 제재 조처가 취해진 이후에도 유럽의 일부
업체들은 이런저런 제재의 허점을 이용해 중국에 무기를 수출해 왔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배경을 살펴보면 나름으로 이유가 있다. 톈안먼 사태 당시 유럽 지도자들이 발표한 공동 선언문을 보면 중국 당국의 ‘잔인한 시위
진압에 항의해 중국과의 무기 거래를 금지한다’는 단 한 줄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무기 품목을 수출 금지 대상으로 지정할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나라 별로 금수의 기준이 들쭉날쭉했고, 자연히 군수 업체들은 허술한 규정을 빠져나갔다.
전통적으로 미국과 척을 지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 일부 군수 기업들이
무기 금수 조처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주문받았던 헬기·구축함용 레이더와 미사일 등을 판매했다. 국제 군비 관련 연구소인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 기업은 1995년부터 2002년에도 경비행 헬기를 꾸준히 수출해왔다. 또 이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군수 기업들도 1991년 전투기용 미사일에 이어 2001년 구축함용 레이더를 수출했다. 영국의 롤스로이스 사와 미국의 앨리슨
사도 무기 금수 기간에 중국에 버젓이 전투기 엔진을 판매했다. 또 독일의 다임크라이슬러 AG의 한 계열 업체는 중국의 잠수함에 사용될 수 있는
디젤 엔진을 지금도 공급 중이다.
유럽연합 통계에 따르면, 2003년 한 해 자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중국과 교역한 유럽 기업들의 수출
총액은 약 5억5천만 달러에 달했다. 이들 기업의 수출품은 민수용이라는 미명 아래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지만, 얼마든지 군사용으로 전환될 수 있는
첨단 제품들이라고 미국측 군사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바로 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다. 만약
전면적인 금수 해제가 이루어질 경우 중국의 전력 현대화 노력이 급속도로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타이완에 각종 첨단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 일종의 세력 균형을 꾀해 왔다. 그런데 유럽 각국이 무기 금수를 풀고 자유롭게 중국과 무기 거래를 할 경우,
이런 세력 균형은 하루아침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유럽
순방중 유럽의 금수 해제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과연 유럽이 금수 조처를 풀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울러
부시는 동맹의 만류도 뿌리치고, 굳이 동맹이 잠재적 위협으로 상정하고 있는 나라에 무기를 팔려는 유럽의 태도에 대해 미국 의회 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실제로 친타이완 성향 의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 의회는 유럽이 중국에 대한 금수 조처를 해제할 경우 즉각 보복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공화당 중진인
톰 랜토스 의원은 “유럽이 대중국 금수 조처를 해제할 경우, 미국 의원들은 매우 강력한 보복 조처를 취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하원은
지난 달 대유럽 결의안을 채택하고 유럽의 무기 금수 해제가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져올 것이라면서, 그럴 경우 유럽의 대미
수출에 제약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했다. 상원도 곧 비슷한 결의안을 채택할 움직임이다.
유럽은 과연 미국의 뜻을 거스를까?
미국의 강경 대응에 대해 유럽도 신경 쓰는 눈치다. 유럽 군수업체들의 대미 수출 규모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 내에서만 3만명을 고용하고 있는 영국 최대의 군수업체인 BAE 시스템스는 1년에 50억 달러 이상을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 민간 연구기관인 렉싱턴 연구소의 로렌 톰슨 박사는 “미국 의회가 유럽 제재에 나설 경우 미국 국방부와 거래 중인 유럽 군수업체
대부분이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유럽 관리들이 막무가내인 것만은 아니다.
설령 유럽이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를 해제하더라도 이른바 유럽연합의 ‘행동 준칙(Code of Conduct)’에 따라, 최첨단 무기와 민감한
기술은 중국에 넘어가지 않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측은 실제로 유럽 기업의 대외 무기 수출 품목 가운데 80% 이상이 이 기준에 따라
거래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유럽은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를 해제하게 되면 ‘행동 준칙’을 더욱 강화해 첨단 무기나 관련 기술의 중국 이전을 원천
봉쇄하겠다며 미국을 달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여전히 ‘금수 해제 불가’다. 무기
금수가 풀리면 중국이 유럽으로부터 사들이려는 것은 탱크나 전투기 같은 전통적 품목보다는 첨단 고등 무기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미국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미국의 뜻을 거슬러가며 무기 금수를 해제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제재에 따른 손실보다는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 해제를 통해 얻게 될 정치·경제적 이득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브뤼셀에 있는 유럽아시아문제연구소의 빌렘 반 데르 게스트 소장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은 중국에 무기말고도 자동차와 향수도
팔고 싶어한다’면서 ‘유럽은 무기 금수 해제 결정에서 이런 비군사적인 상품 수출이 가져올 막대한 이득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하나, 유럽연합은 오랜 동맹 관계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해온 미국에 대해
상당한 불만과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 유럽연합이 중국과 손을 잡으면, 제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매사를 독단으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무기 금수 해제와 관련한 유럽의 의중이 어느 쪽으로 쏠리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