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필자는 언론 현장에 있으면서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민주주의 이론 분야의 유명한 학자들을 연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당시 ‘노사모’라는 초기 팬덤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기는 했어도 지금의 ‘빠’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걱정했다기보다는 1998년을 정점으로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늘어나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춘 기획이었다.
그러나 최근 총선에서 윤석열 정부의 미숙과 실정이 거대 야당을 탄생시키면서 보여주고 있는 더불어민주당과 이른바 조국혁신당의 행태는 노골적으로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어대고 있다. 대표 선출에 90% 안팎의 지지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민주와는 거리가 멀다. 국회 개원 이후 저들이 보여주는 반(反)문명에 가까운 몰지각한 행태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2007년 당시 필자는 프랑스에서 사회사상가 알랭 투렌, 세계사회학회장 미셸 비비오르카 교수, 마르셀 고셰를, 영국에서 데이비드 헬드 교수를 만났다.
알랭 투렌은 “서구가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낸 계몽주의·합리주의가 소수 문화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며 특히 중국·러시아·인도가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상을 짚었다. 투렌의 지적은 오늘날 봐도 효력이 있다. 오히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대만과 중국의 양안 긴장이 높아지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때보다 민주주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투렌은 또 미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가 되지 못하고 점점 종교적·군사적 성채(城砦)로 변모되는 현상을 예측했는데 지금 보니 정확한 진단이었다. 과거의 다양한 약자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되 “여전히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집단적이고 수동적인 의식에 매몰되어 있으면 사회는 개선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해 마치 오늘의 한국 사회를 예견한 듯하다.
비비오르카 교수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던 후쿠야마를 비판하면서 시장과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는 시대는 오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며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첫째, 환경·생명공학·국제범죄 등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문제들을 민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이기적 개인주의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공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적인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기적 개인이 합리적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서로 간 문화 차이를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한 국가 내에서 이념이 다른 세력끼리 ‘차이의 인정’을 받아들여야 하고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투쟁의 체제가 아니라 화해의 체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상 전문 잡지 ‘데바(le debat)’의 편집장 고셰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지식인들이 민주주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식인들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민주주의를 돌보는 목동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런던 정경대(LSE) 헬드 교수는 “현재 세계는 민주주의와 자기 결정의 힘을 높이려는 흐름 사이에서 혼란한 모습을 모이고 있다. 자기 결정력을 위해 민주주의를 기꺼이 포기하는 지도자 및 국민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고 진단했다. 한국과 관련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려면 유연하면서도 비판적인 시민이 광범위하게 존재해야 한다. 더불어 창의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시민이 많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 17년 세월을 돌아보니 기술은 첨단을 향해 달린 반면, 민주주의는 실로 정체 내지 퇴보의 길을 걸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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