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급등에 사재기 조짐까지…“일반 소비자 턱밑까지 위협”
윤석열 대통령은 5월19일 낮 참모들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 인근 ‘옛집국수’에서 5000원짜리 국수로 점심을 해결했다. 식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바로 옆의 ‘소보로빵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후식으로 빵과 쿠키 등을 3만5000원어치 샀다. 윤 대통령의 밀가루 음식 사랑은 원체 유명하다. 검사 시절 단골 식당 칼국수를 먹으러 광장시장을 뻔질나게 찾았고 대선후보 때도 유세 도중 국수, 우동, 쫄면, 도넛 등을 맛있게 ‘흡입’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옛집국수와 소보로빵집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다녀간 이후 소문을 듣고 온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대통령 입장에선 식도락을 즐기고 대통령실 주변 지역 상권에도 기여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그러나 기자가 5월24일 만난 해당 국숫집과 빵집 주인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이들은 최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밀가루 가격 탓에 ‘대통령 방문 특수’를 누릴 겨를이 없다.
이날 오후 3시쯤 찾은 옛집국수 문에는 ‘재료 소진 죄송합니다’란 문구가 붙어있었다. 옛집국수 주인은 “대통령이 왔다 간 뒤 손님이 밀려들어 재료가 조기 소진되는 통에 일찍 영업을 마치고 있다”면서 “(대통령 방문이) 영광이긴 한데, 열심히 장사해도 계속 이윤은 남지 않아 속상하다”며 한숨을 지었다. 밀가루를 비롯한 식재료 값이 줄줄이 올라 제조 원가와 공과금, 인건비 등을 제하면 남는 게 없다고 그는 전했다. 밀가루를 더 사들여 영업해 봐야 제자리걸음일 테니 차라리 문을 일찌감치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대통령 특수’ 압도한 물가 리스크
대표 메뉴인 온국수를 5000원에 파는 이 식당은 저렴한 가격과 따뜻한 인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옛집국수 주인은 “국수를 싼 가격에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써왔는데, 이제 힘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국수 장사가 마진율이 낮아 하루 벌어 하루 지내는 수준”이라며 “여느 식당들처럼 밀가루를 (더 비싸지기 전에) 넉넉히 비축해 놓을 만한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했다.
비슷한 시간 소보로빵집의 인기 빵들도 다 팔리고 없었다. 소보로빵집 주인은 계산대에서 기자가 고른 우유식빵(5000원)을 계산하며 “밀가루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 손님들이 부담스러워 할까 봐 빵값은 못 올리고 우리 허리띠만 바짝 졸라매고 있다”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을 아이스커피 한 잔으로 달래려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쿠키 매대가 텅 비어있어 연유를 묻자 카페 주인은 “집에서 쿠키를 직접 만들어 이윤을 거의 남기지 않고 (서비스 차원에서) 1200원에 팔아오다가 밀가루 가격 폭등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판매를 중단해 버렸다”며 “(판매 중단 직전에) 따져봤더니 제조 원가가 1500원이더라. 가격을 1600원 정도로 올려 팔아볼까도 생각했으나, 밀가루 가격이 더 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접었다”고 했다.
이 가게 손님 배형준씨(가명·57)는 “커피를 마실 때 꼭 곁들이는 쿠키가 없어져 아쉽다”면서 “뉴스에서 떠드는 ‘밀가루 대란’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나 같은 일반 소비자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는 게 체감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옆에 있던 정수연씨(37)는 “얼마 전에 빵집에서 평소처럼 빵을 이것저것 골랐더니 4만원이 넘게 나와 깜짝 놀랐다. 이전엔 아무리 많이 사봐야 3만원대였는데, 밀가루 가격 상승에 빵값도 확 오른 것”이라며 “빵순이 중 빵순이로서 빵 소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관세청과 식품업계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밀 수입량은 42만9000톤, 수입액은 1억7245만 달러로 톤당 가격이 402달러에 달했다. 2008년 12월(406달러) 이후 13년3개월 만에 최고 기록이다. 1년 전 같은 달과 비교하면 41.4%,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2020년 3월보다는 54.3% 각각 상승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와 글로벌 물류난이 지속되는 탓이다.
자영업자와 소비자 모두 피부로 느껴
국내에 수입되는 사료용 밀이 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산이다. 식용 밀은 미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 수입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 곡물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중이다. 수입 밀 가격이 오르면 밀가루는 물론 밀을 원료로 사용하는 국내 식품이나 사료 등도 덩달아 비싸진다. 한국소비자원 ‘참가격’을 보면, 전국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중력다목적용 곰표 밀가루 1kg(미국·호주산 밀 사용)의 5월26일 기준 평균가격은 1610원으로 1년 전 평균가격(1310원)과 비교해 약 23% 상승했다. 세계 2위 밀 생산국인 인도가 5월13일(현지시간) 식량 안보를 이유로 밀 수출 금지를 결정하면서 국제 밀 가격이 추가로 상승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날 저녁 대형마트 밀가루 매대 앞에서 만난 주부 현미혜씨(43)는 “집에서 요리할 때 밀가루를 많이 쓰는 편은 아니지만, 앞으로 더 오를 것 같아 몇 포대 사두려 한다”며 백설 찰밀가루 2.5kg(호주산 밀 사용) 3포대를 쇼핑카드에 담았다.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는 밀가루 사재기 조짐도 나타난다. 서울 시내에서 칼국숫집을 운영하는 정명희씨(가명·60대)는 “보통 20kg짜리 밀가루 20포대를 창고에 두고 있다가 지금은 보관 물량을 60포대로 3배 늘렸다”며 “밀가루가 주재료인 칼국숫집에서 밀가루 가격 상승은 가장 큰 불안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밀가루 가격 상승세가 언제 꺾일지 몰라 밀가루를 많이 사뒀다’는 내용의 게시글이 속속 올라온다. 일각에선 중간상인들이 가격 상승 장기화에 대비해 밀가루를 창고에 쟁여두고 폭리를 노린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이는 식용유 수급난의 학습효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앞서 밀가루처럼 가격 폭등세인 식용유를 두고 비슷한 논란이 일었다. 식용유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서 자영업자들의 식용유 재고 확보 수요가 늘어났고, 사재기로 이어졌다. 식자재마트와 창고형 할인점 등에서 식용유가 동나자 주요 대형마트와 온라인쇼핑몰 등이 부랴부랴 1인당 구매 개수를 대용량 1~2통, 소용량 10~15병 등으로 제한했다. 온·오프라인에서 식용유 판매량은 구매 수량 제한 전보다 더욱 늘어났다. 전형적인 가격 상승 국면의 사재기 현상이다.
수급난에 매점매석 의혹도 제기돼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공급망 훼손에도) 식용유와 밀가루 공급사들의 공장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공장으로부터 발주량의 10~20%밖에 받지 못하는 도·소매상이 부지기수”라며 “공장에서 생산한 식용유와 밀가루가 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업계에선 자본력 있는 중간상인이 물밑에서 매점매석을 한다는 의심이 파다하다”고 귀띔했다.
옛집국수에 밀가루 등 식자재를 공급하는 최성욱 태평종합유통 대표는 “예년에는 한두 가지씩 한 자릿수 %로 올랐지만, 요샌 쌀값 빼고 다 기본 20~30%씩 급등한다”며 “비상시국에 홀로 이득을 취하려 (매점매석 같은) 비위를 저지르는 건 굉장히 질 나쁜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 대표는 “식당들에 물건을 공급하려고 돌아다니다 보면 자영업자들 사정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 놀란다. 끝 모른 채 상승하는 제조원가와 맘대로 못 올리는 음식값 사이에 끼여 이도저도 못 하는 신세”라면서 “특히 손맛도 맘씨도 좋은 식당들이 제대로 장사를 못 하게 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손님들에게 돌아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광진구 아차산역 근처에서 14년째 맛집으로 이름난 ‘건풍e치킨’의 김태완 사장은 손님들로부터 “가격을 좀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압박(?)을 받고 있다. 눈에 띄게 저렴한 가격을 6년 넘게, 요즘같이 밀가루와 식용유 대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고수하고 있어서다. 대표 메뉴인 ‘크리시피후라이드’와 ‘순살 후라이드’는 각각 9900원, 8900원(포장 가격)이다. 치킨 프랜차이즈와 비교하면 반값 수준이다.
창업 초기 김 사장은 크리시피후라이드 치킨을 1만3000원에 팔았다. 오토바이로 배달하다가 사고를 당한 뒤부터 ‘저가 정책’이 시작됐다. 배달을 못 하게 되고, 주변에 경쟁 업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가게 앞 배너에 ‘가격 인상하지 않고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라는 문구까지 써놓고 ‘결사 항쟁’ 중이지만, 유독 가혹한 현 상황 앞에 버틸 여력이 많이 떨어진 게 사실이다. 김 사장은 “물가 급등뿐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도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다들 살기 팍팍하다”며 “모든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가격을 올리고 싶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재기 얘기도 들리는데, 남들이 사재기한다고 나도 똑같이 하면 전반적인 물가가 올라가고, 모두에게 피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서 “일단 가격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사서 써야지 어쩌겠느냐”고 덧붙였다.
밀가루 대란과 관련해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5월23일 “공급망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라며 “안정적인 국내 공급을 위해 기업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밀가루와 식용유의 가격 상승과 수급난이 올해를 넘어 내년까지 장기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밀가루가 싸야 국수 더 퍼줄 텐데…걱정 커”
尹 대통령 다녀간 ‘옛집국수’ 배혜자 할머니, 딸 통해 심경 전해
윤석열 대통령이 5월19일 다녀간 서울 용산구 ‘옛집국수’는 24년 전 한 노숙인 남성에게 희망을 안겨준 미담으로 유명하다. 새벽녘에 한 허름한 남성이 가게로 들어오자 주인장 배혜자 할머니(85·당시 61)는 한눈에 노숙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남성은 허겁지겁 온국수 한 그릇을 비워냈다. 뚜벅뚜벅 다가간 배 할머니는 남성의 그릇을 ‘빼앗듯이’ 가져가 국수 하나를 더 말아줬다. 그마저 순식간에 먹어치운 남성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냅다 줄행랑을 쳤다. 쏜살같이 도망가는 그의 등을 향해 배 할머니는 외쳤다. “그냥 걸어가! 뛰지 말구. 넘어지면 다쳐! 배고프면 담에 또 와.”
달리던 남성은 할머니의 그 말 한마디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고 아내까지 떠나간 상처, 이후 노숙 생활의 설움 등이 눈물에 씻겨 내려갔다. 몸과 맘을 추스르고 파라과이로 떠난 남성은 사업에 성공했다. 어느 날 옛집국수가 소개된 TV 프로그램을 보고 PD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에 이른다. 당시 2000원이었던 온국수 가격은 이제 5000원이지만, 배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은 변함없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실은 300원이던 1981년 개업 때부터 한결같았다. 옛집국수는 재기한 남성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수많은 미담과 추억을 켜켜이 쌓아온 노포 중의 노포다.
옛집국수를 사랑하는 단골들에게 최근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배 할머니가 다리를 다쳐 가게에 나오지 못하고 있어서다. 대를 이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딸(3남 1녀 중 맏이)에게 할머니의 근황과 심경을 전해 들었다. 배 할머니는 41년 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4남매를 키울 일이 막막해 국숫집을 시작했다. 국수, 그리고 손님들과 함께한 어머니의 인생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60대 딸은 "나는 그냥 우리 어머니의 딸일 뿐"이라며 이름, 나이 등의 노출을 극구 꺼렸다.
배 할머니의 근황은.
“한 달 반쯤 전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병원에서 가게 상황이 어떠냐고 계속 물어보신다. 올해 2월에 (물가 상승 때문에) 온국수를 4000원에서 5000원으로 올렸는데, 밀가루 등 식재료 가격이 더 무섭게 올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어떤 부분을 특히 걱정하나.
“어머니는 모두가 쉽게, 배부르게 국수를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해 왔다. 어머니가 식당을 여신 뒤로 우리 식구끼리만 밥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꼭 밥숟가락 더 놓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었다. 어머니 소원이 배고픈 사람 모두에게 공짜로 국수를 말아주는 것이다. 여건상 그렇게는 못하고 최대한 저렴하게 국수를 팔며 버티다가 어렵게 가격을 조정한 상황에서 또 국숫값을 올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상황이 괴로운 것이다.”
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큰 것 같다.
“그렇다. 어머니는 고령에도 손님들 맞이하는 재미 하나로 가게에 나왔다. 손님들이 내 식구가 밥 먹듯이 편안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지금은 가격이 오르고 가게에 나와보지도 못하니 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국수 장사로 돈을 적잖이 번 것도 아니다. 국숫집 자체가 마진이 적은 데다 어머니는 항상 주변에 퍼주며 사셨다. 국수 한 그릇 팔고 두 그릇은 거저 주시는 통에 어머니께 제발 그만 하시라고 투정부린 적도 있다.”
가격 상승을 이해하지 못하는 손님도 있을 듯하다.
“가끔 서운해하는 손님도 계신다.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어 안타깝고 속상할 따름이다.”
물가가 속히 안정돼야겠다.
“빨리 해결되면 좋겠다. 밀가루 가격이 안정되고, 국수를 싸게 팔 수 있어야 좀 맘껏 퍼줄 수 있지 않겠나. 어머니의 영원한 바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