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때까지 아버지 밑에서 독학으로 축구 배워
16년 만에 ‘골든 부트’ 품에 안고 세계 최정상 자리 올라
5월24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2개월 만에 귀국한 손흥민은 수수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빛나는 트로피가 들려 있었다. ‘골든 부트’, 유럽 축구 빅리그의 득점왕이 거머쥐는 황금축구화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아닌 금족환향(金足還鄕)인 셈이다. 몇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린 수천 명의 인파는 아시아인 최초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스포츠 영웅의 이름을 연호했다. 밝은 미소와 함께 가벼운 인사를 남긴 손흥민은 휴식과 6월 A매치 소집 대비를 위해 떠났다.
시즌 최종전 2골로 극적인 EPL 득점왕 등극
손흥민은 한국시간으로 5월23일 새벽 끝난 2021~22 시즌 프리미어리그 최종전에서 2골을 추가, 자신의 커리어 최다인 리그 23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리버풀의 모하메드 살라와 함께 차지한 공동 득점왕이었다. 노리치시티 원정 경기에 선발 출전한 손흥민은 살라에게 1골 차로 뒤진 21골로 출발했다. 같은 시간 울버햄튼과의 홈 경기에서 살라는 부상 여파로 벤치에서 출발했다. 살라가 최종전에서 득점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손흥민은 최소 1골 이상이 필요했다.
리그 4위까지 주어지는 다음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확정 짓기 위해 노리치전에서 최소 무승부가 필요했던 토트넘은 전반 16분과 32분 데얀 쿨루셰프스키와 해리 케인의 연속 골로 가볍게 앞서 나갔다. 후반 19분 쿨루셰프스키의 추가골이 터지자 그때부터는 모든 관심이 손흥민의 양발에 쏠렸다. 전반, 이타적인 플레이에 집중하던 손흥민이 후반부터 찬스를 만들었지만 노리치의 수문장 팀 크룰이 유달리 그때마다 슈퍼세이브를 기록했다. 득점왕으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은 후반 25분이었다. 교체 투입된 루카스 모우라가 발 뒤꿈치를 이용한 멋진 패스로 노리치 수비진 사이로 공을 보냈고, 손흥민이 오른발로 깔아 차며 22호 골을 만들었다.
5분 뒤 손흥민은 멀티 골을 성공시켰다. 페널티박스 정면 왼쪽에서 공을 잡아 수비를 제친 뒤 그대로 오른발로 감아 때린 공이 노리치 골대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같은 시간 교체 투입된 상태였던 살라는 득점이 없었다.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을 직감한 토트넘 동료들은 그를 둘러싸고 무동을 태우며 환호했다. 토트넘은 세 시즌 만의 챔피언스리그 복귀, 그리고 두 시즌 연속 득점왕 배출(2020~21 시즌 케인)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순간이었다.
3분 뒤 살라가 득점에 성공하며 공동 득점왕으로 결말이 났지만, 두 선수의 표정은 극과 극이었다. 맨체스터 시티에 밀려 리그 우승에 실패한 리버풀의 살라는 득점왕이 전혀 기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살라의 득점왕은 애당초 확정적이었다. 9라운드 만에 10골을 돌파한 그는 리그 10경기를 남겨두고 20골 고지를 밟은 상태였다. 당시 손흥민은 11골에 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10경기에서 손흥민은 무려 12골을 작렬시켰고, 살라는 3골을 넣는 데 그치며 판이 뒤집힐 뻔한 것이다.
내용 면에서도 손흥민이 더 빛났다. 살라는 23골 중 5골이 페널티킥 득점인 방면, 손흥민은 단 한 골도 페널티킥 득점이 없었다. 토트넘은 올 시즌 다섯 번의 페널티킥 득점이 나왔는데 전담 키커인 케인이 4골을 기록했다. 득점왕 다툼이 절정에 달했던 5월15일 번리와의 경기에서도 페널티킥이 나왔다. 손흥민에게 밀어줄 법도 했지만, 팀 또한 챔피언스리그 티켓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변함없이 케인이 나서 마무리했다.
“저 친구, 왼발잡이야? 오른발잡이야?“
올 시즌 손흥민의 득점 난이도는 매우 높았다. 최근 축구에서 활용되는 공격 분석 지표인 ‘득점기댓값(XG)’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득점을 둘러싼 여러 상황의 난이도를 종합적으로 계산한 XG에서 손흥민은 시즌 15.69골을 기록했다. 즉 손흥민은 확실한 찬스를 살리는 건 물론이고 순수한 자기 능력으로 7골 이상을 더 뽑아낸 것이었다. 원더골 제조기라는 의미다. 살라는 이 수치에서 23.62였다. 오히려 찬스에 비해 1골가량을 적게 득점했다. 득점 지역 분석에서도 손흥민은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4골을 뽑은 반면, 살라는 23골을 모두 페널티박스 안에서 기록했다.
영국의 유력 매체인 스카이스포츠가 선정한 시즌 파워랭킹에서도 손흥민은 살라는 물론 케빈 더브라위너(맨체스터 시티)까지 제치며 최종 1위에 올랐다. 공격 포인트와 공헌도 등 여러 지표에서 종합 8만1031점을 차지한 손흥민은 살라(7만4336점), 더브라위너(7만1973점)를 압도적인 차이로 앞섰다. 시즌 베스트 11인 팀오브더시즌에도 공격수 부문에 살라, 케인과 함께 뽑혔다. 더브라위너는 EPL 사무국이 선정한 MVP를, 살라는 잉글랜드축구기자협회(FWA)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한 상태다. 손흥민은 EPL 사무국 MVP 후보 8인에는 들었지만 잉글랜드프로축구선수협회(PFA) MVP 후보 6인에는 들지 못해 선정 기준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주관적 선택이 아닌 객관적 지표에서는 손흥민이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였다는 방증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레전드 출신 게리 네빌은 프리미어리그 최종전 후 BBC의 축구 전문 프로그램 《먼데이나잇풋볼》에 출연해 손흥민에 대한 극찬을 보냈다. 그는 “나는 올 시즌 최고의 선수로 손흥민을 꼽는다. 전력상 리버풀보다 약한 토트넘에서 뛰고 있지만 모든 걸 극복했다. 현재의 손흥민은 유럽 어느 팀에 가도 그 팀을 한 단계 향상시켜줄 클래스의 선수다. 나는 손흥민이 왜 당연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 못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2015년 여름 손흥민은 이적료 3000만 유로(약 408억원)를 기록하며 독일 바이어 레버쿠젠을 떠나 영국 토트넘에 입단했다. 2008년 대한축구협회 유학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로 건너간 손흥민은 2010년 여름 두각을 나타내며 분데스리가 명문팀 함부르크SV 성인팀에 합류했고, 그해 11월 4년 정식 계약에 사인했다. 2013년 1000만 유로에 레버쿠젠으로 이적했고, 2년 뒤 자신의 목표 중 하나였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꿈꾸던 무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토트넘에서의 첫 시즌에 발바닥 부상으로 고생하며 4골을 넣는 데 그쳐 적잖은 의심과 비판에 시달렸다. 마음고생 중이던 2016년 여름 볼프스부르크에서 적극적인 오퍼를 보내자 손흥민은 익숙한 독일 분데스리가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실제로 토트넘 구단에서도 손흥민을 정리하고 사디오 마네(당시 사우샘프턴, 현 리버풀), 윌프레드 자하(크리스탈 팰리스) 영입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선수단을 이끌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현 파리생제르맹) 감독이 손흥민을 설득해 잔류시키며 모든 역사는 바뀌게 됐다.
손흥민은 2016~17 시즌에 포체티노 감독의 신임 속에 리그에서만 14골을 기록하며 리그 적응을 완료했다. 그 시즌 이래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보다 많은 골을 터트린 선수는 케인, 살라, 마네, 그리고 제이미 바디(레스터시티) 등 4명뿐이다. 페널티킥 득점 숫자를 빼면 손흥민은 바디를 제치게 된다. 포체티노 감독은 양발을 활용하는 손흥민의 다재다능함을 늘 칭찬했다. 현대 축구에서 양발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은 공격수에겐 중요한 무기다. 올 시즌에도 손흥민은 23골 중 오른발로 11골, 왼발로 12골을 넣었다. 현재 토트넘을 이끌고 있는 안토니오 콘테 감독은 “손흥민은 분명 오른발잡이다. 그런데 가끔은 ‘저 친구 왼발잡이지?’라고 착각할 정도로 양발을 사용하는 데 차이가 없다”며 감탄한 바 있다.
정식 축구부 몸담지 않고, 부친이 기본기 훈련만 반복시켜
이런 최고의 축구 선수가 탄생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아버지인 손웅정씨다. 공교롭게도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손흥민을 만든 마지막 23번째 골은 아버지와 함께 한 수백만 번의 훈련이 만든 패턴이었다. 이른바 ‘손흥민 존’으로 불리는 페널티박스 정면 좌우의 45도 각도 지점에서의 감아차기다. 손흥민은 아버지에게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뒤 자신의 고향인 춘천 공지천변 운동장에서 매일 훈련을 빼먹지 않았다. 볼 컨트롤과 트래핑, 패스의 기본기를 철저하게 연마한 뒤 매일 1000번씩 반복 훈련을 했던 것이 바로 그 감아차기였다. 손웅정씨는 자신의 자서전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흥민이가 기본기와 체력을 쌓고 어느 정도 하드한 훈련을 소화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좌우 두 개의 존에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의 슈팅 훈련을 시켰다. 멈춰 세운 공이 아닌 내가 강하게 차준 공을 컨트롤해 정확하게 마무리하는 것을 무한 반복했다”며 오늘날 손흥민 존 탄생의 과정을 소개했다.
손흥민은 자신의 아버지를 “최고의 코치이자, 멘토이며, 친구 같은 존재”라고 얘기한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세계 최정상 무대에 선 만 30세의 성인 손흥민이 최고 레벨의 팀 훈련 후 여전히 아버지와 개인 훈련을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노력과 헌신이 축구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를 만든 기적을 선사했다. 손웅정씨는 “함부르크에서도, 레버쿠젠에서도, 토트넘에서도 슬럼프가 있었다. 그때마다 흥민이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훈련을 부탁한다”고 했다. 단지 지시하고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본인 역시 손흥민의 훈련량을 옆에서 함께 소화하는 완벽한 파트너다.
선수 출신인 손웅정씨는 부상으로 인해 프로 선수 생활을 3년 만에 마치고 사라진 케이스다. 1987년 현대(현 울산)에 입단해 16경기에서 5골을 넣으며 주목받았지만, 1989년 일화(현 성남)를 떠나 28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현대에서 함께 선수생활을 했고, 나중에 손흥민을 국가대표팀에서 지도한 최강희 감독은 “손웅정은 부상으로 너무 일찍 선수생활을 접은 아까운 인재였다. 축구를 더 잘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후배였다. 다른 선수들이 경기 후 회포를 풀러 갈 때도 아쉬움에 공 한 번 더 차겠다던 선수였다. 지금 와서 손흥민을 보면 그 고민으로 선진적인 훈련법을 터득한 것이다”고 기억을 돌아봤다.
은퇴 후 청소년 시기 축구를 배웠던 제2의 고향 춘천으로 향한 손웅정씨는 두 아들(흥윤, 흥민)을 얻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던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차남 흥민이 “진지하게 축구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다.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이자 가장 냉정한 코치로 거듭났다. 손흥민은 중학교 2학년까지 정식 축구부에 몸담지 않고, 아버지 밑에서 철저하게 기본기 위주의 훈련을 진행했다. 손씨는 “선수 한 명 제대로 제치지 못했던 내 선수 시절의 후회가 준 깨달음”이라며 현재 운영 중인 SON축구아카데미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본기 중심의 훈련 이유를 설명했다. 15세에 원주 육민관중학교 축구부에 입단하며 처음 세상에 등장한 손흥민은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고, 유럽으로 진출했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스토리로 대한민국과 아시아의 한계를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선수를 키운 손웅정씨는 2018년 한 인터뷰에서 강경하게 “흥민이는 절대 월드클래스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겸손과 적극적 노력, 긍정적 인생관을 통해 자신의 아들에게 스스로를 낮추는 삶을 강조해온 그지만, 이제는 아들을 인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그리고 손흥민은 정점에 선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시즌, 그리고 다가올 월드컵을 위해 날개를 펴기 위한 노력을 변함없이 아버지와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