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LH 퇴직자 1500여 명에 대한 조사와 수사가 겉돌면서 흐지부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투기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여야도 특검 도입에 합의했으나 LH 퇴직자들에 대한 의혹 규명 없이는 공직자 투기의 발본색원이 구호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합동조사단이 지난 11일 발표한 1차 조사 결과에서 투기의혹자로 걸러낸 LH 직원 20명 가운데 대부분은 입사 30년 차 이상으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이들은 노후 대비 차원에서 신도시 예정지 땅에 투자한 것인데, 이런 형태의 투자가 LH 내부에서 관행화돼 이미 퇴직한 임직원들도 현직 때 대거 이런 형태의 투자를 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앞서 2일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을 처음 폭로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는 “현직 직원이 퇴직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공동으로 신도시 토지를 취득한 경우도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7월 LH 내부에서 직원의 땅 투기 의혹에 대한 제보가 있었음에도 LH는 아무런 조사에 나서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실이 LH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LH 레드휘슬(부조리신고) 접수현황’ 자료에 따르면, 퇴직 직원이 현직으로 있을 때 개발 정보를 미리 파악해 부인이나 제3자의 이름으로 토지를 사들였다는 구체적 제보가 있었으나 LH는 퇴직 직원은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묵살했다.
LH 김아무개 팀장은 지인 5명과 함께 지난 2018년 1월 경기도 광명시의 땅을 사들였는데 이들 중에는 2015년 퇴직한 전직 간부도 포함돼 있다. 이는 현직과 전직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 형태의 투기로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현직은 물론 퇴직자들까지 전수조사하지 않을 경우 LH 사태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LH 퇴직자는 정부가 조사하기로 한 지난 2013년 이후 지난해까지 1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퇴직자가 전현직들의 출자를 받아 땅 투자 법인을 설립하고 신도시 등의 투기에 나섰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경우엔 토지 거래 기록에 법인명만 남아 단속을 피할 수 있다. 민변과 참여연대는 전수조사 대상에 퇴직자도 포함돼야 진정한 의미의 조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인 이강훈 변호사는 “연령대가 높은 LH 직원들이 한탕하고 나갔을 가능성이 꽤 있다고 추측한다”며 “이들은 오랜 관련 업무를 통해 익힌 식견으로 어디다 투자하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지만 내부정보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퇴직자는 일반인이어서 현실적으로 퇴직자 조사와 수사가 쉽지 않다. 현직 LH 직원이나 공무원은 전수조사를 위해 본인과 직계존비속의 개인정보 이용 동의를 요구할 수 있지만 퇴직자는 이를 강요할 수 없다. 고소·고발이나 뚜렷한 실정법 위반 혐의를 잡기 전에는 수사도 어렵다.
퇴직자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다고 해도 투기자 색출이 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 9일 땅 투기 의혹으로 고발된 15명 가운데 현직 13명만 자택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전직 2명은 강제수사에 필요한 혐의를 잡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을 공공주택특별법이나 부패방지권익위법으로 엮으려면 ‘업무상 비밀'’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지만 퇴직자여서 해당 사항이 아니다.
이 때문에 퇴직자들의 투기 의혹을 수사하려면 농지법 저촉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개발 예정지의 농지를 매입할 때 제출한 농업경영계획서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신도시 가운데 특정 시점에 거래가 가장 왕성한 지역의 토지 거래를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위법 여부 확인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변호사는 “LH 퇴직자에 대한 수사 의지만 확고하다면 한국부동산원이 가진 토지 거래 정보를 뒤져 특정 지역의 의심 거래를 추출하는 방식 등으로 농지법 위반 여부를 확인하면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