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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먼저냐, 사면이 먼저냐

국정농단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대법원이 징역 20년형을 최종 선고했다. 2017년 4월 구속 기소된 지 3년9개월 만이며, 2016년 10월 최순실의 태블릿PC 공개로 국정농단 사건이 촉발된 2016년 10월 이후 4년3개월 만이다.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1월14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기소된 박 전 대통령의 재상고심에서 징역 20년·벌금 180억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률적 절차가 마무리됨에 따라 관심은 박 전 대통령의 사면으로 모아지고 있다. 현행 사면법은 특별사면 및 감형 대상을 ‘형을 선고받아 확정된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 상고심에서 징역 17년에 벌금 130억원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 따라서 박근혜·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 모두 형식상 사면 요건은 갖춰졌다.
ⓒ시사저널 이종현·임준선·연합뉴스

이낙연, 작년 8월 인터뷰에서 사면에 ‘부정적’

전직 대통령 사면은 정국을 뒤흔들 변수임에 틀림없다. 여권의 고민은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 정권 후반기 대선을 앞두고 사면 카드를 쓰는 것은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게 뻔하다. 다음 정권으로 이를 넘기는 것도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 그동안 사면에 관해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사면 논란에 불을 지핀 것에서 여권 지도부의 이러한 고심이 읽힌다. 이 대표는 지난해 8월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가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조기 사면을 묻는 질문에 “법률상 형이 확정되기 전에는 사면이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불가능하다”며 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이 대표는 ‘형이 확정된 다음에 조기 사면하는 것은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것은 형이 확정된 다음 얘기다. 대통령의 판단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다소 여지를 남겨두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완강하게 반대했던 이 대표가 불과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입장을 바꾼 것은 왜일까. 올 1월1일 통신 3사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그는 “‘적절한 시기’가 되면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문재인 대통령께 건의드릴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 대표는 ‘적절한 시기’를 묻는 질문에 “‘법률적 상태’나 시기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법률적 상태=적절한 시기’를 감안할 때 두 전직 대통령 사면 건의 시기를 ‘대법원 선고 이후’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 대표 발언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과 민주당 게시판에선 사면 반대 의견이 거세게 일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모습이다. 무엇보다 청와대가 “사전에 어떠한 교감도 없었다”고 밝힐 뿐, 사면과 관련해 뚜렷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사면을 제기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3일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 회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선 ‘대통령 의중을 이 대표가 간파하고 먼저 언론에 알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1월초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이 (사면) 이야기를 꺼냈고 이 대표가 자기 의견으로 얘기해 여론의 반응을 살펴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대표의 한 측근 인사도 “통상 정치권에서 NCND(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는 긍정에 가까운 의미 아니냐. 청와대가 NCND 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윤건영 민주당 의원도 페이스북에 “사면 논란은 이제 그만하자”면서도 “정치인으로서 가지는 소신은 존중돼야 한다. 민주당은 입장을 분명히 정리했다. 원칙을 견지한 판단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대표 발언 직후 청와대를 통해 나오는 문 대통령의 메시지 중 ‘통합’이 유달리 강조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문 대통령은 1월7일 신년 인사회에서 “새해는 통합의 해”라고 밝혔다. 이후 ‘대통령의 의중이 사면에 있다’는 관측이 돌자 문 대통령은 11일 발표된 신년사에선 ‘통합’ 대신 ‘포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새해 정부의 정책 기조를 ‘회복·도약·포용’으로 요약해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사면과 관련해 여론의 관심은 1월 중순으로 예정된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으로 모아진다. 기자회견에선 어떤 식으로든 문 대통령이 사면과 관련해 입장을 밝힐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청와대 내부 기류를 종합하면, 사면의 기본 원칙은 △당사자 사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 △여야 합의로 요약된다. 다만 세 가지 모두 이뤄지지가 쉽지 않다. 1월13일 나온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최 수석은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나와 “(사면은)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 눈높이에서 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날 최 수석의 발언 내용을 출입기자들에게 돌림으로써 간접적으로 사면에 관한 내부 방침이 있음을 시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해 보수 태극기 세력은 탄핵 자체를 부정한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수감을 정치탄압으로 본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주변인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들의 대국민 사과가 이뤄지기란 쉽지 않다.
1월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이재명, 사면 반대의사 내비쳐

국민적 공감대 역시 아직까지는 부정적이다. 한국갤럽이 1월8일 공개한 여론조사를 보면 ‘현 정부에서 사면해선 안 된다’는 응답(54%)이 ‘현 정부에서 사면해야 한다’는 응답(37%)보다 월등히 많았다. 1월11일 공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전직 대통령 사면이 국민 통합에 기여할 것인가’에 응답자의 56.1%가 ‘기여를 못 할 것’이라고 답해 38.8%를 기록한 ‘기여할 것’보다 많이 나왔다. 또 국민의힘이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 ‘아무 전제조건 없는 사면’만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야 합의 또한 쉽지 않다. 민주당 내 반대 기류는 초반보다는 다소 누그러드는 모습이다. 그러는 사이 이낙연 대표에 대한 ‘비토’ 분위기도 많이 줄어들었다. 되레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한 거부반응이 더 크다. 민주당 게시판에서 진행된 당원투표에서는 이낙연 대표의 대표직 사퇴 반대와 이재명 지사 출당 찬성 의견이 많이 나왔다. 핵심 지지층의 충돌로 관심을 모았던 투표에서 당원들은 이 대표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이로써 사면 발언 이후 당내 반발에 부닥쳤던 이 대표로선 한 고비를 넘기게 됐다. 만약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이 조건부 사면 입장을 밝힌다면 이 대표로선 문심을 확인했다는 측면에서 친문계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된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형량 모두를 채울 게 아니라면 4년 정도의 수감생활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책임은 물었다고 할 수 있다”면서 “선거에 이용할 목적이 아니라면 사면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도 가급적 빨리 결정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사면 논의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는 여권 내 생각 또한 만만치 않다. 또 다른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본인들이 잘못한 바 없다고 하는데 용서해 주면 ‘권력이 있으면 다 봐주는구나’ 생각할 수 있다”며 사면 반대의사를 내비쳤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당 중진의원은 “두 전직 대통령 모두가 법원으로부터 뇌물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기에 정치적으로만 사면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뇌물·알선수재·수뢰·배임·횡령 등 범죄에 관해서는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다른 나라들도 사면은 임기 말 사면이 정치적 논란을 줄일 수 있었다”면서도 “결국 시점이 문제겠지만 사면 자체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선고 이후 신영대 민주당 대변인은 “박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죄하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면서 “국민의힘은 국민이 받은 상처와 대한민국의 치욕적인 역사에 공동 책임이 있다”고 논평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논평에서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국민과 함께 엄중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대변인은 “제1야당으로서 민주주의와 법질서를 바로 세우며 국민 통합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원론적으로 논평했다. 한편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춘추관 브리핑에서 “국회 탄핵에 이어 법원의 사법적 판단으로 국정농단 사건이 마무리됐다”면서도 “대법원 선고가 나오자마자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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