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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없이 전원회의 결과로 대체…‘새로운 길’과 ‘민생’ 사이 고민
부친상 때 제외하고 빠짐없이 신년사 발표
형식 면에서 북한의 2020년 시작은 달랐다. 김 위원장이 1월1일 올해 신년사를 내놓지 못한 건 분명 파격이란 점에서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집권한 김 위원장은 장례 절차 등으로 경황이 없던 2012년을 빼고 이듬해부터 매년 1월1일 직접 신년사를 발표했다. 3대 세습을 통해 절대권력을 넘겨받은 이 ‘청년 지도자’는 때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때론 ‘인민들에 대한 지도자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름 화제가 됐던 신년사를 선보였다. 북한 엘리트와 주민들뿐 아니라 한국과 국제사회는 매년 1월 첫날 그의 입을 주목했다. 하지만 올해 북한 관영 선전매체에선 그의 육성이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지난해 말 나흘 동안의 일정으로 열린 노동당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이뤄진 김 위원장의 ‘보고’ 형식의 연설 내용이었다. 노동신문도 1면부터 5개 면을 할애했다. 조선중앙TV를 통해 오전 9시부터 55분간 이뤄진 전원회의 결과 보도는 북한이 처한 대내외적 상황과 이에 대한 김 위원장의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미국의 대북 압박과 북한의 대처, 경제 상황이나 체제 고수를 겨냥한 최고지도자 김 위원장의 진단과 처방전인 셈이다. 신년사를 전원회의 결과로 대체한 건 북한 권력 핵심부가 고심 끝에 택한 고육책일 수 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로부터 뜻밖의 일격을 당한 김 위원장은 리더십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회담 성과에 고무된 북한 대미라인과 김 위원장은 하노이 담판에 영변 핵시설 포기 카드를 준비해 가면서 또 한 번의 외교적 성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결렬을 각오하고 나온 듯한 트럼프의 협상술에 밀려 예상 밖 ‘노딜’을 맛봤고, 평양-하노이 왕복 6일간의 2만리 열차행군이란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지난해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연말까지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라’며 미국을 압박했지만 미국은 “북한의 일방적 데드라인에 얽매이지 않겠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19년을 보내고 맞는 새해 첫날 신년사를 강행했다면 당 간부와 엘리트 세력, 주민들은 김 위원장의 입만 쳐다보는 형국이 됐을 게 뻔하다. 자칫하다간 “말로만 미국에 엄포를 놓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최고지도자”라는 비아냥이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대체품이 절실했을 것이다. 미국과의 이슈뿐 아니라 내부 문제까지 망라해 전원회의를 치르고 그 결과를 언론보도 형태로 공개한 건 트럼프와의 대미 담판이나 연말 시한에 쏠린 주민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물타기 효과도 노린 것일 수 있다. 이례적으로 무려 나흘간의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김 위원장은 이른바 ‘조성된 대내외 형세하에서 우리의 당면한 투쟁방향’이란 첫째 의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우리 정부 당국이나 언론이 김 위원장의 ‘국방력 강화’와 ‘새로운 전략무기 개발’ 발언에 초점을 집중적으로 맞춰 가려지긴 했지만 A4용지 20장 분량의 보도문 중 상당 부분은 경제문제와 과학기술·보건·교육·생태환경·자연재해 예방 등이 차지했다. 이런 대목에선 북한이 2020년 초나 상반기까지 대미 협상이나 군사·안보 분야의 대립각 세우기나 위기 고조에 치중하기보다 체제 내부 결속이나 경제문제를 챙기는 쪽에 상당한 역량을 집중할 것임을 엿볼 수 있다. 대북제재를 11차례나 언급한 김 위원장의 발언에서는 절박감마저 느껴진다. “적대세력들의 제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도 꺼낸 김 위원장은 “자력갱생을 말하면서도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며 화살을 당 간부에게 돌렸다.“사회주의 부귀영화” 공언 스스로 뒤집은 셈
김 위원장은 당 전원회의 보고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 자력번영하여 나라의 존엄을 지키고 제국주의를 타승(打勝)하겠다는 게 우리의 억센 혁명신념”이라고 강조했다. 집권 첫해인 2012년 4월 김일성광장 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약한 것을 8년 가까이 만에 뒤집은 것이다. 지난해 12월 백두산을 찾아 “귀뿌리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며 청년·학생과 근로자 등에게 한겨울 백두산 답사행군을 지시한 김 위원장의 말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힘든 겨울나기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겐 또 한 번의 날벼락이 닥친 것이다. 북한이 당면한 군사·안보적 위기나 체제 유지 딜레마는 나흘간의 노동당 회의로 탈출구를 마련할 수 없다. 김 위원장이 공언한 ‘새로운 길’은 회의장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북한)·미 관계 결산을 미국이 주저할수록 (북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인식대로라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김 위원장의 고민은 체제 내부 문제에도 닿아 있다. ‘사회주의 부귀영화’ 운운하며 주민들을 현혹하다가 다시 희생과 정면돌파전을 요구하는 건 불만 요소다. 민생과 시장에 방점을 두지 않는 권력을 북한 엘리트와 신흥자본 세력, 주민들이 거부한다는 건 후계자 시절인 2009년 말 김 위원장이 사실상 지휘한 화폐개혁의 실패에서 확인됐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별로 없어진 세상에서 김 위원장이 찾아야 할 건 ‘새로운 길’과 ‘새로운 전략무기’가 아니라 체제 생존과 민생의 방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