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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첩보요원이 털어놓는 ‘함박도의 진실’…1950~60년대 북파 공작 루트의 중심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 있는 함박도(咸朴島)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6월 국내 한 매체의 보도로 쟁점화된 함박도 문제를 정리하면 ‘이 땅이 과연 우리 땅이냐, 북한 땅이냐’는 것이다. 최근 함박도가 재조명받는 중심에는 부처 간 혼선이 있다. 네이버지도·구글어스 등에서 ‘함박도’를 검색하면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라고 뜬다. 각종 온라인 지도상에서 NLL은 교동도 앞에서 말도를 지나 ‘S자’ 모양으로 휘어 백령도·연평도·대청도·소청도 등이 모두 우리 영토로 들어온다. 지도상으론 함박도 역시 우리 땅이다.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이라는 지번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이곳은 북한군 점령지다. 실효적 지배가 그 이유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한국전쟁 직후까지 서해 5도에서 공군 첩보요원으로 활동한 이두우씨(왼쪽)와 김인호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 ⓒ 시사저널 이종현·임준선
한국전쟁 직후까지 서해 5도에서 공군 첩보요원으로 활동한 이두우씨(왼쪽)와 김인호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 ⓒ 시사저널 이종현·임준선

전자지도에는 우리 땅으로 나와

이와 관련해 명확한 근거는 나와 있지 않다. 행정 전산화 이전에 생긴 일이다 보니 명확한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다만 지번은 1978년 ‘미등록도서 및 비정 위치도서 등록사업’을 거치면서 생겼다고 보는 게 맞다. 네이버지도처럼 국토부 토지이용계획도에도 함박도는 우리 땅이며 명목상 통제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해양수산부 장관 고시에는 절대보전지역이다. 하지만 NLL을 관리·감독하는 국방부는 정전협정을 근거로 “함박도는 분명 북한 땅”이라고 말한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함박도가 NLL을 기준으로 북쪽 700m에 위치해 있기에 우리 땅이 아닌 것은 맞다”면서도 “정전협정 당사자가 우리가 아닌 유엔사였기에 NLL과 관련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며, 솔직히 역대 정부도 이 문제(함박도)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과거 공군 첩보대에 근무한 이들은 “휴전 이후까지 함박도에서 수많은 작전활동을 펼쳤다. 그땐 그곳이 당연히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지금까지 함박도는 사실상 방치된 땅이었다. 김인호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휴전 이전까지 북파 첩보요원들의 귀환 기착지로 쓰였던 곳이 용매도(북한 황해도 소재)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 땅이었으니까 용매도를 거쳐 귀환한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휴전 이후 용매도가 북한 영토로 들어가자 기착지로 대신 쓰인 곳이 바로 함박도였다”고 증언했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말도에서 함박도 사이 3km에는 염전 등이 많았다. 물이 빠지면 함박도 반경 6km 일대가 커다란 갯벌로 변한다. 썰물 때는 8km 정도 떨어진 우도와도 연결된다. 휴전 이후 꽤 오랜 시간 경계선도 불분명했다. 이 때문에 말도·볼음도·주문도 어부들은 거대한 조개 어장이 형성된 이곳에서 종종 조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불상사도 발생했다. 1965년 10월29일 함박도 인근에서 우리 어부 109명이 북으로 끌려가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북한군 20여 명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틈을 타 인근 갯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 232명을 습격했으며, 이 중 일부를 북으로 끌고 갔다. 1933년생으로 한국전쟁 당시 자원입대해 공군에서 상사로 근무한 이두우씨는 “당시 섬 주민 상당수가 생활고를 겪어 성능이 좋은 우리 첩보대 소속 배를 조개잡이를 하는 데 쓰도록 도와줬다”고 설명했다. 김 부회장도 “첩보대 소속의 큰 배가 움직이니까 북쪽이 오해를 한 것 같다”면서 “그때 북으로 끌려가 4명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아마도 HID(대북침투부대) 소속 첩보요원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함박도 주변에선 우리 측도 북측 주민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공군 첩보대 말도 파견대장(중위)으로 근무한 유아무개씨가 국무총리 소속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 앞으로 보낸 진술서에 나와 있다. 서류에서 유씨는 “1965년 10월7일 북괴가 말도 앞바다 비무장지대까지 침범하여 숭어잡이 하는 북괴 어부를 납치하고자 시도하였으나 5~6명씩 모여 작업하기 때문에 납치하기가 어려워 귀대하였음. 1965년 11월23일 공군 제○○○○부대장의 공작 승인에 따라 말도 앞바다 비무장지대 갯벌에서 조개잡이 하는 우리 어민에게 접근하여 오는 북괴요원을 납치하고자 매일 임무 수행한 사실이 있었음”이라고 진술했다. 북한군이 우리 어민을 납치한 것은 이 두 시기 중간에 생긴 일이다. 1930년생으로 1954년 9월 입대해 1965년 8월31일 전역한 정영훈 공군정보전우회 감사는 “말도에 독립 가옥을 마련한 후 부대 소유의 영미호·영락호를 타고 북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1965년 우리 어부 절반이 북으로 끌려가지 않은 것도 우리 영미호·영락호가 대응사격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65년 10월31일자 조선일보는 “경기도경은 이날 납북사고를 당한 어부들은 볼음도·말도·교동도 등의 영세어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조업 중이던 5척의 어선 중 영미호·영락호(첩보대 소속으로 추정)는 귀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강화도에서 볼 때 가장 끝에 있다고 해 이름 붙여진 말도(末島)에는 당시 공군 첩보부대가 있었다. 5·16 군사정변이 난 1961년까지 말도 파견대장으로 근무한 이두우씨에 따르면 교동도에서 출발, 말도→함박도→용매도로 가는 길은 대북 침투 루트였다. 이씨는 “북에 들어간 요원들은 주로 친척들을 활용해 북한군의 동태들을 파악했다”면서 “당시만 해도 황해도 일대 섬에는 북한군이 아닌 노농적위대가 있어 침투가 쉬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함박도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김 부회장은 “말도에서 용매도를 거쳐 북으로 가는 길에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바로 함박도”라고 설명했다. 복귀 루트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파공작원들은 말도에서 함박도를 향해 보내는 수신호를 받아야 돌아올 수 있었다.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했던 무장 북파공작원을 양성하던 실미도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왼쪽)이 9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함박도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왼쪽)이 9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함박도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썰물 때 함박도 인근 섬, 갯벌로 모두 연결돼

김 부회장은 “함박도는 물이 차면 70~80평 정도만 보이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했는데, 이런 곳이 지금 이렇게 논란이 될지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북한군은 무인도였던 이곳을 대대적인 매립 공사를 통해 유인도로 바꿨다. 군 당국은 북한군이 2015년 이후 중요 통신장비를 이곳에 설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글어스 등을 통해서도 북한 군 시설이 이곳에 들어선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최근 남북 화해 무드로 볼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육상에서는 비무장지대 GP(감시초소)가 철수 또는 파괴되는 상황인데 해상에서는 되레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논란을 낳기에 충분하다. 논란이 일자 군은 “9·19 군사합의 전에 시작한 일이며 만일의 경우 적 시설을 타격할 만큼 충분한 대응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명했다. 반면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북한군이 이곳에 방사포 등을 둘 경우 인천공항은 물론 한강 이남까지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며 군 당국의 해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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