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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시간의 피날레…10년의 추억을 건드린 마블의 역작

*주의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감동적이고 웃기고 충만한데 급기야 슬프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안기는 슬픔은 떨쳐내고 싶은 아픔이 아니라, 지난 시간을 반추하게 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저릿한 감흥을 남긴다. 《아이언맨》(2008년)부터 이어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MCU)의 피날레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 ) 이야기다. 짐작건대, 마블과 지난 10년을 함께한 팬이라면 이 영화를 싫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마블에 기대했거나 상상했던 것들, 그 이상을 담아낸 한 페이지의 종착역이니 말이다.  현대 히어로 무비에는 세 번의 중요한 분기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브라이언 싱어와 샘 레이미가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지휘봉을 잡았을 시기가 첫 번째다. 이들은 히어로들에게 묵직한 고뇌와 다층적인 개성을 안기며 히어로물을 얕잡아 보던 일각의 시선에 강하게 맞섰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등판이다. 놀란이 《배트맨》 시리즈를 맡은 7~8년 동안 히어로 무비는 단순한 오락의 영역을 뛰어넘어 철학적인 영역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81분 영화지만 체감 시간 짧아

그리고 세 번째. 마블이 《아이언맨》과 함께 등장했다. 마블의 행보는 앞선 사례들과는 사뭇 달랐다. 앞선 작품들이 작가주의 감독들의 성취에 힘입어 ‘코믹북도 감독 하기 나름’이라는 점을 증명했다면, 마블은 여러 히어로를 하나의 소우주에 등장시키는 혁신적인 접근 방식으로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 자체를 바꿔버렸다. 솔로 무비의 주연으로 활약한 히어로가 다른 작품에선 카메오로 출연하고, 또 어떤 작품에선 떼로 등장해 협업하는 광경은 영화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 자체를 새롭게 만들었다. 마블의 이런 ‘따로 또 같이’ 전법으로 쌓여온 감정들은 《엔드게임》에서 폭발한다.  “《엔드게임》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 달려왔다고 보면 됩니다.” 마블 수장 케빈 파이기의 말이 암시하듯, 《엔드게임》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파트2로만 보는 건 무익한 일이다. 이 영화는 지난 10년간 이어진 마블의 영화 22편을 아우르는 모두의 파트2라고 보는 게 맞다. 이는 단순히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차원의 말이다. 《엔드게임》은 지난 영화들의 에피소드를 놀랍도록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으며, 이를 다시 활용하거나, 새롭게 해체해서 조립하는 놀라운 신공을 선보인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만나는 건, 기억 속에 저장된 그들 각자의 추억이다.  《엔드게임》은 181분에 이르는 엄청나게 긴 영화지만, 체감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게 느껴진다. 심지어 그 많은 신과 쇼트 중에 굳이 넣어야 했나 갸웃거리게 하는 게 딱히 없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사연이 잘 매만져진 덕분이며, 3막 구조를 통해 분위기 전환을 경제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해낸 까닭이다.  일단 시작은 《인피니티 워》의 엔딩을 잇는다. 기억하는가. 인피니티 건틀렛을 장착한 타노스(조슈 브롤린)가 손가락 하나 튕겨서 인류 절반을 사라지게 한 무시무시한 광경을. 타노스의 핑거스냅이 가져온 지구의 광경은 암울하고도 황폐하다. 이는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헐크(마크 러팔로),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등 타노스와의 혈투에서 살아남은 히어로들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어떤 히어로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서 방황하고, 어떤 히어로는 지켜내지 못한 미안함에 자책하고, 어떤 히어로는 그조차 견디기 힘들어 현실을 외면해 버린다.  《엔드게임》이 기존 시리즈들과 다르게 드라마가 강하게 느껴진다면, 영화가 이 부분에 꽤 공을 들여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서사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비롯한 배우들이 히어로 무비 이전에 독립영화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연기파 배우들이었음을 증명하게 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간극이 큰 감정 표현을 허락받은 배우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그만큼 드라마도 깊어진다.  그렇다면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언급한 1400만분의 1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트레일러가 예고했듯, 희박한 희망을 싣고 달려오는 건 ‘양자 영역’에 갇혀 있었던 앤트맨(폴 러드)이다. 이미 마블은 ‘양자역학’과 밀접하게 연관된 앤트맨이 시리즈 결말에 대한 거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연신 ‘떡밥’을 뿌려왔다. 그 ‘떡밥’은 예상대로 수거되지만, 이는 설정일 뿐,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니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대 앤트맨 행크 핌(마이클 더글러스) 박사가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설명했듯, 양자역학은 ‘시간과 공간의 모든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개념’이다. 흡사 《백 튜더 퓨처》를 연상시키는 이 개념은 마블이 아주 즐길 만한 상황이다. 예상대로 유머의 꽃이 피고, 그 유머는 백발백중 과녁에 꽂힌다. ‘유머 맛집’으로 이름난 마블의 솜씨야 이미 아는 맛이지만,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극의 무게감이나 비극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웃음을 주는 일엔 공력이 필요한 법이다. 마블은 다시금 이 분야의 거성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다.  물론 《엔드게임》에는 관객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기대하는 액션도 기다리고 있다. 이 영화가 구현해 낸 전쟁 스펙터클은 감정적으로 특히나 짜릿하다. 객석의 환호를 끌어낼 만한 등장신들이 있고, 캐릭터 개성을 활용한 위트 넘치는 액션 시퀀스가 즐비하며,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려는 연대와 우정이 내내 우렁차게 손을 흔든다. 


원년 멤버들에 대한 예우

무엇보다 《엔드게임》은 원년 멤버들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다. 《인피니티 워》에서 가루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히어로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짐작하겠지만, 마블의 개국공신들은 모두 타노스의 핑거스냅을 피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재능을 지닌 새로운 식구들이 늘었지만, 중요한 한 시기를 마감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마블로부터 지구 수호의 임무를 발부받은 건 개국공신들이다. 이들의 탄생과 고뇌, 성장, 반목, 화해의 역사를 지켜봐온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흔적과 조우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지난 10년은 영혼(Soul), 시간(Time), 공간(Space), 정신(Mind), 현실(Reality), 힘(Power)을 관장하는 스톤을 모으는 과정이었다. 이 중 개국공신들과 관객을 잇는 스톤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라는 이름일 것이다. 시간이 준 선물 앞에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몇몇 이별 앞에서 눈물이 흐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엄청난 피날레를 아름답게 장식한 건 원년 멤버들이지만 이 과정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인물은 케빈 파이기다. 모두가 ‘NO’라고 할 때 뜻을 굽히지 않고 마블 프로젝트를 가동시킨 인물. 한물갔다고 평가받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기용하고, 쿠키를 영화 곳곳에 심고, 시리즈를 종과 횡으로 연결시킨 장본인. 《엔드게임》은 MCU를 완벽하게 조율한 이 인물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한 페이지를 마감한 마블의 발걸음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까. 모든 건 이 사나이의 머릿속에 있고 지난 10년이 그랬듯 그는 또 다른 놀라운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10년 후에도 우리가 마블에 “3000만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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