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유업 창업주인 홍두영 전 명예회장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서부동 출신이다. 1919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홍 전 명예회장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4년 일본 와세다 제1고등학교를 마치고 와세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고향 영변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47년 같은 영변 출신인 열 살 아래 지송숙씨와 결혼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4 후퇴 때 가족 등을 데리고 월남했다.
홍 전 명예회장은 첫 사업에 실패했다. 전쟁 후인 1954년 부산에서 비료 수입상인 ‘남양상사’를 세웠다. 하지만 1962년 화폐개혁으로 8년 만에 모든 재산을 날렸다. 첫 사업 실패 후 홍 전 명예회장은 보수적 경영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장남인 홍원식 현 남양유업 회장에 대한 경영수업도 일찌감치 시작했다. 비료 수입에 종사하던 그는 외국 출장을 가서 분유 사업에 관심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양유업을 설립한 것은 1964년 3월이다. 당시 정부는 보릿고개 해결뿐 아니라 농민 소득 증가를 위해 낙농사업에 대한 정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967년 1월 출시된 ‘남양분유’는 오늘의 남양유업 초석을 다진 대박 상품이었다. 1977년 나온 남양요구르트도 히트 상품 반열에 올랐다. 남양유업은 1978년 유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했다. 회사가 성장가도를 달리자 가족들이 합류했다. 장남 홍원식 회장과 차남 홍우식 현 서울광고기획 사장 등이 남양유업 성장에 기여했다. 홍 전 명예회장은 1990년 4월 최고경영자 자리를 홍원식 회장에게 물려줬다. 그러면서 두 가지 금기사항을 강조했다. ‘기업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지 말 것’ ‘부동산 투기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
하지만 홍 전 명예회장의 외손녀 황하나씨가 마약에 손을 대면서 남양유업 이미지에도 큰 생채기가 났다. 남양유업은 “황하나씨는 남양유업과 전혀 관련이 없다”며 “엄정한 수사를 통해 공정하고 강력하게 처벌되기를 바란다”는 입장까지 내놨다. 남양유업은 ‘황하나 사태 꼬리 자르기’와 함께 대리점 항의 무마 등 뒷수습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