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5화 - 인도와 이집트서도 3·1절 시기 ‘비폭력’ 독립 함성 터져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그날의 감동을 되새기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같은 식민 지배를 겪은 이집트와 인도도 최근 대대적인 행사 준비에 한창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3·1운동과 같은 시기에 두 나라에서도 대규모 반영(反英) 시위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이집트에서는 3·1 만세 함성이 울린 지 열흘도 채 안 돼 반식민 투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같은 시기, 식민지 세 나라서 터져 나온 ‘비폭력’ 독립 함성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적국 터키의 지배에 놓인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선언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집회가 금지됐고, 농민들은 가축과 식량을 징발 당하거나 노무대에 편성되어 중동과 유럽 전선에 투입됐다. 전쟁 말기엔 노무대원 숫자가 15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이집트인들의 희생이 컸다. 영국은 전후 독립을 약속하며 이들의 불만을 달랬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태도를 바꿔 사드 자글룰 등 민족 지도자들을 몰타 섬으로 쫒아내자 이집트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919년 3월 9일 노동자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비무장 시위대와 영국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져 800여 명이 사망했다.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민중 봉기 역시 종교·성별·신분을 뛰어넘은 반식민 운동이었다. 친영(親英)성향의 기독교인 콥트교도와 무슬림이 서로의 사원을 찾아 함께 독립을 외쳤고, 심지어 여성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여성들이 대중 시위에 참여한 것은 아랍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이집트 여성들은 남성 출입금지 구역인 ‘하렘’이나 집에 갇혀 살며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국군의 해산 명령을 무시하고 뙤약볕에서 농성을 펼쳤다. 시위를 이끈 후다 샤으라위(1879~1947)는 1923년 로마에서 열린 여성인권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할 때 머리와 목, 어깨를 가린 ‘히잡’을 벗은 채 기차에서 내렸다. 마중 나온 사람들은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일부 여성들은 히잡을 벗어 던지기도 했다. 이 일은 이집트 여권운동의 물꼬를 튼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선에서도 여류화가 나혜석이 여성들의 억눌린 삶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후다처럼 3·1시위에 참여하고 옥고까지 치른 그는 “자식은 모체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다”란 충격적인 글을 발표해 ‘꽉 막힌’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려 3년에 걸친 이집트인들의 저항과 탄압, 외교적 ‘밀당’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1922년 3월 1일 독립이 허용됐다. 물론 영국이 군사와 방위권, 외교권 일부, 교통 및 통신권을 그대로 갖게 되어 ‘무늬만 독립’이란 평가도 있다. 허나 세계대전 후 승전국이 식민지 저항에 굴복한 사례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1919년 이집트 민중 운동을 ‘혁명’으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집트 민중 봉기가 일어난 직후, 같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로우래트법’이 통과됐다. 이 법에는 테러나 시위를 막기 위한 강압적인 조치들이 들어있었다. 1919년 3월 30일 분노한 델리 시민들이 반영 시위를 벌였고, 이는 북부 펀잡주(州), 뭄바이로 확산되어 유혈 사태로 번져 나갔다. 이런 와중에 펀잡주 암리차르에서 영국인 여교사가 주민들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치안을 맡은 레지날드 다이어(1864~1927) 영국군 준장은 “사건 현장을 지나가는 인도인은 자기네 신에게 하듯 네 발로 기어가도록 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영국 여인은 힌두교의 신 못지않게 ‘신성한’ 존재란 이유였다.
소요 사태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자 4월 13일 다이어 준장이 이끄는 영국군은 암리차르 공원에 난입해 사전 경고 없이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난데없는 총격에 공원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출입구를 막아버린 탓에 우물로 뛰어들거나 짓밟혀 죽은 사람까지 15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처음부터 영국군은 ‘진압이 아닌 학살’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 끔찍한 사건은 3·1운동 당시의 ‘제암리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일제 헌병대가 평화적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어 문을 잠그고 불 지른 다음 총을 쏴 23명을 죽였다. 암리차르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이틀 뒤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이없는 일은 암리차르 만행에 대한 영국 본토의 반응이었다. 영국 상원에서는 다이어 준장을 ‘폭도들을 진압한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모닝포스터지’는 대영제국의 영웅을 위한 모금운동까지 벌여 2만6000파운드와 명예의 검을 그에게 전달했다. 심지어 《정글북》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노벨상 수상자 러디아드 키플링조차도 그를 ‘인도의 구원자’로 칭송했다. 반면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암리차르 학살에 항의해 영국 작위를 반납하고 반영 투쟁대열에 뛰어들었다.
귀족가문 출신의 변호사 자와할랄 네루(1889~1964) 또한 이 사건으로 조국 인도의 참담한 현실을 깨닫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훗날 그는 감옥에서 딸 인디라에게 “제국주의란 약탈하면서도 친선을 과도하게 내세우고, 죽이면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선언하는 방식을 취한다”라는 글을 보냈다. 네루는 또한 3·1운동을 언급하며 “한국 국민, 특히 젊은이들이 가공할 세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많은 어린 여성들이 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어린 딸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기도 했다.
네루 “제국주의는 죽이면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운다”
인도와 이집트, 한국의 민중 시위는 같은 시기에 벌어졌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암리차르 사건만 해도 엄격한 검열 탓에 3개월이 지나서야 외부에 알려질 정도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세 나라 시위는 남녀·신분 구분 없이 전국민이 참여한 점, 비폭력 시위란 사실, 제국 군경의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까지 닮은 점이 많다. 묘하게도 세 시위의 사망자 수도 500명에서 1000명 사이로 비슷했다.
거기에다 이집트는 제한적이나마 독립을 이뤘고, 한국도 일제 통치방식의 변화를 끌어냈다. 하지만 인도는 달랐다. 사건 후 다이어는 여교사 구타 사건이 일어난 곳에 태형장을 만들었다. ‘엎드려 기어가지 않는’ 주민들을 붙잡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해댔다. 학살 이전보다 더 간악하고 포악해진 식민통치에 인도인들은 치를 떨었고. 이들의 분노는 21년이 흐른 뒤 복수극으로 이어졌다.
1940년 런던에서 암리차르 사건 당시 펀잡 주지사대리였던 마이클 오드와이어가 저격당했다. 살해자 우담 싱은 사건 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학살의 진짜 ‘몸통’에게 복수한 게 너무 기쁘다”, “조국을 위한 죽음보다 더 큰 명예가 어디 있겠는가”라며 교수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처럼 학살이 또 다른 살인과 처형으로 이어졌지만, 1997년 암리차르를 방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울부짖는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2013년 사건 현장을 찾은 캐머론 영국 총리도 “민간인 학살은 극악무도한 짓이었다”면서도 유감만 표명했을 뿐이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배를 사과하고 배상에 나선 경우는 흔치 않다. 영국이 케냐 마우마우족 학살 사건에 대해 사과하거나 이탈리아가 리비아 점령시 강제수용소에서 수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자신들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결국 “힘이 있어야 사과도 받아낼 수 있다”라는 게 국제사회의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얼마 전 우리 국회의장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왕의 사죄를 요구했다. 국제 현실이 이럴진대 사죄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네루가 갈파했듯 ‘죽이면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우는’ 제국주의의 본성이 지금이라고 달라지겠는가. 되지도 않을 사죄 운운 보다 이제라도 정쟁을 그치고 힘을 한데 모으려는 각오가 ‘그날의 함성’에 대한 후손들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