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를 위한다는 ‘태아보험’이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임신 중 질병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태아보험에 드는 산모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복중 아기’의 질병에 대해서는 각종 특약을 근거로 아무런 보장을 해 주지 않는 태아보험 상품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근 보험사 간 고객 유치 경쟁이 과열되면서 보험설계사들이 태아보험의 이 같은 약관을 교묘하게 회피하거나 생략한 채,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탓에 태아보험에 가입한 부모들은 “태아보험과 기존 어린이 보험 간 큰 차이가 없다”며 보험사의 마케팅 상술에 큰 불만을 호소하고 있다.
아기 아파도 도움 ‘1’도 안 준 태아보험
지난해 7월 서울에서 열린 한 ‘베이비 페어’를 찾은 김명진씨(가명·33) 부부. 당시 김씨의 아내는 임신 2개월 차로 아기 관련 상품을 알아보기 위해 행사장을 둘러봤다. 행사장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붐빈 곳은 국내 보험사들의 ‘태아보험’ 상담 코너. 김씨 부부도 상담을 받은 뒤, 보험설계사의 “요즘 산모들에겐 필수”라는 말에 태아보험 가입을 결정했다. 임신 중 산모나 태아에게 혹시 모를 질병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설계사 역시 ‘배 속 아기를 위한 선택’이라며 가입을 부추겼다.
보험 가입 후 한 달이 지난 뒤 태아에게 문제가 생겼다. 2018년 8월 대전 한 산부인과에서 받은 초음파검사 결과, 태아의 심장에 혹이 생기는 ‘결절성경화증’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결절성경화증은 6000~9000명당 한 명의 빈도로 발생하는 선천성 질환이다. 김씨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아보험을 통해 치료비 부담을 조금 덜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기와 산모의 각종 질병을 보장해 준다’는 보험설계사의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김씨가 받은 보험금은 ‘0원’. 김씨가 항의하자 보험설계사는 “아직 이름도 없는 태아가 어떻게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겠냐”며 지급을 거절했다. 김씨가 “태아가 아플 때 도움이 되려고 가입한 건데 혜택을 받지 못해 황당하다”고 반발하자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김씨는 “이름 그대로 태아보험인데, 출산 후에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게 고객 입장에서는 불합리하다고 느껴졌다. 이럴 거면 태아보험이란 말을 쓰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보험사 관계자들은 ‘약관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부모’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가입한 보험사 관계자는 “보상 대상이나 보상 범위는 약관에 기재가 다 되어 있는 부분인데, 이를 확인하지 않은 부모의 잘못이 크다”며 “애초 태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상품이 아닌데, 가입자가 너무 큰 기대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입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보험사와 보험설계사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에서 ‘태아보험’이란 정식 상품을 판매하는 보험사는 없다. 다만 현대해상(굿앤굿 어린이 보험), 메리츠화재(내맘같은 어린이 보험), 삼성화재(엄마맘에 쏙드는), 동양생명(꿈나무 자녀사랑보험) 등에서 판매되는 어린이 보험 상품에 일부 특약을 추가하면, 이를 편의상 태아보험으로 분류할 뿐이다.
통상 태아가 ‘중대한 선천성 질병’에 걸려 조산하거나 미숙아로 태어났을 경우 입원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특약을 추가한 상품을 태아보험으로 부른다. 결국 태아보험에 가입한다고 해도 엄마 배 속에 있는 태아가 아플 경우, 즉시적인 도움을 받기는 어려운 셈이다. 상품의 약관이나 세부 계약조건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상품이 출산 후 아기나 산모에게 질병이 발생할 경우 수혜를 받을 수 있게 돼 있기 때문이다.
부모 심리 이용한 보험사, ‘불완전판매’ 의혹
가장 큰 문제는 태아보험의 이 같은 특징을 ‘고의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한 채 태아보험이라는 이름만을 미끼로 활용해 가입을 권유하는 보험설계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중대한 선천성 질병’에 어느 병이 해당되는지 등을 말해 주지 않는 식이다. 실제 시사저널과 만난 대부분의 산모들이 태아보험의 존재는 알았지만, 해당 상품의 보장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난해 10월 열린 베이비 페어에 참석했었다는 송유미씨(31·서울 은평구)는 “(보험설계사에게) 배 속 아기가 아프면 어디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냐고 묻자 ‘태아보험이 괜히 태아보험이겠냐’며 ‘100% 들어야만 하는 보험’이란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어 “상담부터 가입까지 총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주변 엄마들이 다 들었다고 하니 일단 들 수밖에 없었다. 설계사도 약관은 (가입 후에) 차분히 읽어봐도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보험설계사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보는 부모들의 특성 탓에, 이 같은 ‘편법 판매’가 성행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12년째 보험설계사 업무를 하고 있다는 최아무개씨는 “태아보험을 찾는 고객 대부분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들이기에, 태아보험에 대한 설명을 여타 보험상품에 비해서는 많이 간소화하는 게 사실”이라며 “경쟁사들끼리 산모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사은품까지 내거는 마당에 태아보험에 대한 기대감을 굳이 깰 이유가 없다”고 귀띔했다.
법조인들은 보험사가 아무리 약관에 관련 내용을 기재했다고 하더라도, 보험설계사가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상품의 이름만을 앞세운 채 주요 내용을 생략한다면 ‘불완전판매’(고객에게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 상품에 대한 기본 내용 안내 없이 판매한 것)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바른의 여지윤 변호사는 “상법 제638조의3 제1항에 의거해 보험자는 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보험계약자에게 보험약관을 교부하고 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는 보험모집인이나 보험중개인에게도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란 사회통념에 비춰 고객이 계약체결 여부나 대가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을 말한다”고 했다. 이어 “따라서 출산 이후에만 혜택을 부여한다든지, 태아 상태일 때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약관조항이 있더라도 설계사가 그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이후 보험회사를 상대로 보험금 청구를 주장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