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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가담자가 들려준 ‘피싱 범죄의 재구성’
“지난 8개월, 그곳은 지옥이었다”…중국 콜센터에선 무슨 일이?

“아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조심스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기자와 만난 김아무개씨(51)는 “사람들이 관심 가질만한 내용인지 모르겠다”라면서도, 과거를 기억해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는 1년 만에 재회한 아들과 또다시 헤어져야 했다. 아들 석원(29·가명)씨는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기자는 서울구치소에 갇힌 석원씨와의 면회와 편지 교환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들어봤다. 어둠의 손길이 그에게 닿은 건 2016년 12월. 당시 한 동네 선배가 “중국에서 단기알바 같이 하자”는 제안을 꺼내왔다고 한다. 무슨 알바인지 물어봐도 선배는 “불법은 아니니 걱정 말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받을 수 있다는 월급은 700만원. 석원씨는 “그 전까지 가구업체에서 알바로 월 400만원 정도를 벌었다”며 “그 두 배도 안 되는 금액이라 큰 범죄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2017년 12월27일 오전 서울 마포 경찰서에서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 수사대 수사관들이 제주에서 대만인이 운영한 중국인 상대 대규모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검거하고 압수한 증거품을 조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7년 12월27일 오전 서울 마포 경찰서에서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 수사대 수사관들이 제주에서 대만인이 운영한 중국인 상대 대규모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검거하고 압수한 증거품을 조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月 700짜리 알바… “범죄라곤 상상도 못해”

석원씨와 선배, 또 다른 후배 2명 등 4명은 2017년 3월 중국 청도로 갔다. 공항에서 나오니 커튼이 쳐진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석원씨 일행은 차를 타자마자 휴대폰과 여권을 빼앗겼다. 그때야 비로소 ‘범죄에 얽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약 20분 동안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산동성 청도시의 한 2층짜리 건물. 석원씨가 반년 넘게 협박 속에서 보이스피싱을 강요받았던 ‘콜센터’였다.  기자가 만난 석원씨의 신장은 170cm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체격이 다부졌다. 헐렁한 죄수복을 입었음에도 겉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흥분기 없는 조곤조곤한 어투는 은근한 위엄마저 들게 했다. “학창시절엔 일진이란 얘기도 들었다”고 아버지는 전했다. 석원씨는 그러나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저항할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조직원의 존재 자체가 겁박이었습니다.” 석원씨가 말했다. 그를 협박한 보이스피싱 팀장은 족히 100kg은 넘어 보이는 거구였다고 한다. 얼굴 밑엔 살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문신이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정말 두려웠던 건 따로 있었다. 가족을 볼모로 한 협박이었다.  조직원들은 석원씨에게 “한국에서 할머니와 둘이 사는 걸 알고 있다”며 “2000만원만 있으면 사람 죽이는 건 간단하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반평생을 함께 산 할머니의 목숨 얘기가 나오자 석원씨는 빌면서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2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올라가보니 바닥엔 피와 물이 흥건했다. 주변엔 부서진 가구들이 널려 있었다. 일행 중 한명이 저항하다 뜨거운 물을 맞고 구타를 당한 것이다. 다음날 그의 몸엔 수십 개의 물집이 잡혔다. 결국 그날부터 석원씨 일행은 보이스피싱 범죄자로 전락했다. 

물고문, 폭행, 협박… “2000만원이면 사람 죽인다”

아침 8시 기상,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범행,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범죄 공부. 석원씨 일행의 하루 일과였다. 모두 같은 건물에서 숙식했지만 서로 말을 섞지 못했다. 방도 따로 썼다고 한다. 집단행동을 막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범행실적이 나쁜 날엔 식사 배급량이 줄어들었다. 말을 안 들으면 주먹이 날아왔다. 석원씨 일행 외에 콜센터엔 여자 한 명을 포함한 7명의 범죄 가담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화기에 “안녕하십니까. 국민은행 ○○○ 대리입니다”를 끊임없이 읊조리고 있었다.  범행은 피해자에게 빚 상환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먼저 국민은행 대출담당 직원을 사칭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줄 테니 채무가 있는 금융사에 대출금을 갚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곧 다른 사람이 전화를 걸어 “(해당 금융사의) 자금 회수팀인데 대출금을 여기로 보내달라”며 계좌번호를 불러준다. 물론 범죄조직의 대포통장이다.  피해자는 사전에 자동응답 시스템으로 걸러진, 마이너스 통장 개설의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불법 수집된 하루 평균 5만 여건의 전화번호 중에서 추려진다. 이 가운데 석원씨는 매일 40~50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보통 10%인 네다섯명이 정말 마이너스 통장이 필요해 개인정보를 알려줬다”고 했다. 일명 ‘서류따기’ 작업이다. 
범죄단체가입 및 활동 혐의로 지난해 10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보이스피싱 가담자 김석원씨가 기자에게 보내온 편지 ⓒ 김석원씨 제공

1400만원 받고 5억원 사기피해 내

여기에 넘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뜯겼다. 범행을 저지른 2017년 3월부터 그해 11월까지 피해를 본 사람은 28명. 30세 남성부터 72세 여성까지 다양했다. 피해금액은 최소 800만원에서 최대 4760만원까지, 총 4억 9888만원이었다. 이를 챙긴 범죄조직은 석원씨에게 8개월 일한 대가로 1400만원을 줬다. 약속한 월급(700만원)에서 반의 반토막인 175만원 꼴이다.  2017년 11월 말, 석원씨는 탈출에 성공했다. 비자 갱신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을 때가 기회였다. 그는 아버지와 논의한 끝에 범죄에 가담한 일행을 데리고 자수를 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총책은 이미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원씨를 꼬드긴 선배도 같이 잡혔는데, 알고 보니 조직원들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모집책 역할을 끝까지 부인한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기자가 석원씨를 알게 된 계기는 2018년 12월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과문이었다. 이 글은 “저는 보이스피싱 범죄 가해자입니다”란 문구로 시작된다. 이어 “피해자 분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를 구하고자 조금이나마 피해 보신 분들을 회복시켜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끝맺음돼 있다. 여기엔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어쨌든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아들처럼 해외 고수익 알바에 속아 비극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힘없이 말했다.
김석원씨가 지난해 6월12일 서울지방경찰청에 낸 자수서 ⓒ 김석원씨측 법률대리인 제공

“고액 알바에 속아 비극 휘말리지 않길”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9월 설문조사한 ‘보이스피싱 인지도’에 따르면, 대학생 1300여명 중 16.7%는 “고수익 알바에 속아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전달한 경우 실형을 받지 않는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틀렸다. 초범이고 가담 정도가 깊지 않아도 공범으로 처벌받을 확률이 높다. ‘범죄인지 몰랐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범죄단체에 가입 또는 활동한 사람은 형법 114조에 따라 최고 징역 10년형을 받을 수도 있다.  최근엔 알바몬 등 구직자들이 자주 찾는 취업포털 사이트에 고액 알바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사기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비트코인 거래소’로 위장한 범죄조직도 있다. 관련 조직과 내통한 적 있는 익명의 업자는 1월22일 기자에게 “빚더미에 오른 사람들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꾐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며 “보이스피싱 범죄에선 가해자가 정말 피해자일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보이스피싱은 ‘고수익 알바’가 아니라 ‘고위험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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