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1화 - 철거냐 수호냐, 동상의 ‘엇갈린’ 운명
어느 나라든 수도의 중심에는 으례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역사적 인물의 동상(銅像)이 서 있기 마련이다. 우리 광화문 광장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3년 전 영국 정부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동상을 세웠다. 자국의 통치에 저항한 식민지 독립영웅을 기리고 빛낸다니 일반의 상식을 뛰어 넘는 일이었다. 제막식에서 영국 총리는 "이 동상은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에게 바치는 감명 깊은 헌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위대한' 간디는 역사적 평가나 공과(功過)가 가장 엇갈리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그의 동상이 논란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지난 12월 12일 아프리카의 가나 대학교 캠퍼스에 있던 간디 동상이 건립 2년 반 만에 철거됐다. 그가 남아공에 거주할 당시 흑인을 ‘검둥이’라며 멸시한 인종차별주의자란 이유에서다. 같은 이유로 말라위 국민들도 그의 동상을 세우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고, 하물며 조국 인도에서는 간디 동상을 공격하는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그의 비폭력 운동은 영국에 독립을 '구걸'하고 협력한 행위였다"란 주장이 과격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같은 비판은 식민종주국 영국이 동상까지 세워 그를 기리는 이유일런지도 모른다.
한쪽에선 무너뜨리고 다른 쪽에선 다시 세우는 '동상의 역설'은 현재 진행형
여기에다 지난 10월 31일에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동상이 인도 구자라트주에 세워졌다. 제작비 약 5000억 원, 높이 182m에 달하는 이 동상의 주인공은 영국 지배에 맞서 싸운 힌두 민족주의자 사르다르 파텔(1875~1950)이다. 한데 동상 건립을 놓고 과거사 논란이 거세다. 파텔과 같은 정치 성향인 모디 총리는 "그의 업적은 간디와 네루에 비해 저평가 되었다"면서 그를 '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반면, 일각에서는 "네루의 후손이 이끄는 야당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며 동상 건립을 비난하고 있다. 인도판 역사 바로세우기가 난데없이 동상으로 불똥이 튄 셈이다.
대체 동상이 뭐길래 이처럼 '얄궂은' 운명을 맞는 걸까? 역사적 인물의 동상은 나라에 큰 업적을 남긴 분을 세인의 본보기로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사람들이 붐비는 공공장소에 세워져 교육적 효과를 주게 된다. 문제는 간디처럼 역사적 공과가 교차되는 인물의 동상을 섣불리 세우는 데 있다. 이런 류의 동상은 훗날 세상이 바뀌면 언제고 공격당하거나 해체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동상의 수난은 이 뿐만이 아니다. 제 손으로 만든 동상들을 불과 수년 만에 다시 용광로에 넣어버린 역사도 있었다. 실제로 1940년대 초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동상 역사상 유례없는 '철거 대소동'이 벌어졌다.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1년 8월 일제는 '금속류 수거령'을 내려 철과 구리를 의무적으로 내놓도록 하는 공출(供出)을 실시했다. 기막힌 일은 이때 학교 교문이나 가로등, 심지어 철로까지 뜯어낸 사실이다. 이바라기현 츠치우라 국민학교는 철로 만든 교문을 통째로 헌납했다. 또 고베시의 명물 '은방울꽃' 가로등 200개가 철거됐고, 군수물자 수송에 영향이 적은 구간의 철로들도 뜯겨졌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1944년 9월 부터 안성선의 장호원-안성 구간 41.8km와 경북선, 광주선, 금강산철도에서 약 150km의 철로 해체 작업이 진행됐다.
전쟁이 격화되고 군수물자가 턱없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구리 덩어리' 동상에 눈독을 들였다. 1943년 3월 일본 전시내각은 '동상 비상회수실시요강'을 의결했다. 그 해 8월에는 '비상공작대'가 구성되어 대대적인 동상 해체 작업에 돌입했다. 동상은 1920년대 이후 군국주의 선전 도구로 건립 '붐'을 이룬 터라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군신(軍神)1호 히로세, 대륙 침략의 신화 육탄 삼용사 등 숱한 전쟁 영웅, 종교인, 유신 정치가 동상들이 마구 뜯겨졌고 '충견공(忠犬公)' 동상 마저 용광로 신세가 됐다.
인간과 반려견, 그 '감동' 스토리 속에 감춰진 군국주의 동상의 망령
충견공은 도쿄 시부야 역에서 통근하는 주인을 따라 나선 '하치'라는 반려견이다. 주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하치는 날마다 이곳에 나왔다고 한다.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란 소문이 매스컴을 통해 확산됐고, 마침내 1934년 '살아있는' 충견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하치 이야기는 애국심 고취에 호재였다. 국민들에게 "개도 주인에게 저렇게 충성하는데 우리는 사람답게 조국에 충성하자"는 메시지를 각인시켰다. 하치 동상은 건립 10년 만인 1944년 10월 시민들의 애도 속에 해체식이 거행됐다. 주목되는 점은 이 행사 명칭이 '출진식(出陣式)'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상이 무기로 만들어져서 전쟁터에 나간다는 뜻이니 일제는 반려견에도 군국주의 망령을 씌운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 남북조 시대의 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 동상은 운좋게 살아남았다. 일왕이 왕실에 충성한 상징물로 '특별 사면'을 내린 덕분이었다. 이 동상은 '천황제' 이념을 전파할 목적으로 일본 전역과 인천에도 세워져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쿠스노키를 포함해 모두 18기의 동상이 공출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연합군사령부 통제에 놓인 일본은 1947년 남아있던 군국주의 동상들을 '자진해서' 철거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신 등 침략 주역들의 동상을 '슬금슬금' 복원하기 시작했고, 결국 1960년대에 이르러 대다수가 재건됐다. 동상의 역사만 보더라도 과거를 반성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이다.
동상 훼손 감시용 CCTV까지 설치
해방 후 동상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 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되었다. 4.19혁명 때는 시위대가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끌고 다녔고, 199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친일파 동상들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또 촛불시위와 탄핵정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이 기념관 창고에 처박히는가 하면 성난 민심이 그의 흉상을 붉은 페인트로 뒤덮는 사건도 이어졌다. 지난 11월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화염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문화재나 기념물을 훼손하는 '반달리즘'은 우리 대학가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현재 고려대를 비롯한 십여 개 대학 캠퍼스에는 친일 논란이 있는 설립자나 총장의 동상이 서 있다. 이를 철거하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대학당국은 훼손 감시용 CCTV를 몰래 달아놓거나, 동상을 잠시 떼었다가 다시 갖다 붙이기도 하고, 방학 중 새벽을 틈타 '동상 설치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요즘 들어서는 좌우 성향의 시민단체들도 학내 동상 분규에 가세해 역사적, 정치적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게 역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일 게다.
동상 주인공이 만들어 달란 것도 아닌데 후대가 세웠다가 부쉈다가 공격하기도 하는 '동상의 아이러니'는 언제쯤 그 끝을 맺을까. 사반세기 전인 1993년 헝가리 민주정권이 만든 '회상 공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에는 구소련 붕괴로 처치 곤란해진 레닌 동상 등 체제 상징물 42기가 모여있다. 철거냐 보존이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과거는 잊지 말되 한데 모아 교훈으로 삼자"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헝가리 정치 지도자들의 고뇌와 지혜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우리 위안부 소녀상이 국내를 넘어 미주, 유럽 등 나라 밖에도 세워지고 있지만 정작 제자들을 정신대로 내몬 친일 인사들의 동상은 교정에 버젓이 서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친일 동상 공원'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갈등의 '시한폭탄'을 그냥 내버려 두기도 영 마땅찮다. 얼핏 이들의 업적과 과오 모두를 동상 비문에 새겨 넣는 방식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할 때다. '동상 적폐' 마저 후대에 물려줄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