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벤투 이어 ‘토종 천하’ K리그도 외국인 감독 선임 줄 이어
프로축구 K리그에서 ‘1강’이라는 수식어를 수년째 유지하고 있는 전북 현대는 올겨울 큰 분기점을 맞았다. 2005년 취임 이후 14년간 팀을 이끈 최강희 감독과 작별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무대까지 평정한 최강희 감독은 중국 슈퍼리그로의 도전을 택했다. 떠오르는 부자 구단 톈진 취안젠이 연봉 80억원의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하며 K리그 최고 명장을 품었다.
지난 10월 최강희 감독이 전북에 통산 6번째 리그 우승을 일찌감치 안기고 중국행을 확정 짓자, 구단도 ‘포스트 최강희’ 찾기에 돌입했다. 11월을 마지노선으로 삼은 전북의 백승권 단장은 국내외 감독들을 총망라한 끝에 포르투갈 출신의 조세 모라이스 감독 선임을 발표했다. 창단 후 4명의 감독이 모두 국내 지도자였던 전북은 처음으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게 됐다.
국내 프로스포츠 사령탑, 특히 우승권의 팀들은 전부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토종 감독’ 일색이다.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우 거스 히딩크 감독이라는 유례없는 성공 사례를 경험하며 심심찮게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지만 프로스포츠는 문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대표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단을 보유한 전북의 외국인 감독 선임은 K리그를 넘어 국내 프로스포츠에 유의미한 화두를 던졌다.
외국인 감독 선임 문턱 낮춘 ‘벤투 효과’
전북은 지난 수년간에 걸쳐 완성한 초호화 스쿼드로 인해 최강희 감독이 떠나도 여전히 우승 후보로 꼽힌다. 일각에서는 어떤 감독이 와도 2~3년간은 우승 도전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현재에 안주하기보다 팀을 한 차례 더 업그레이드하길 원했던 전북은 차기 감독 선임 과정에서 국내 감독보다 외국인 감독에 초점을 맞췄다.
축구 국가대표팀에 파울루 벤투 감독이 몰고 온 긍정적 변화가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 과거의 외국인 감독들과 달리 확실한 축구 철학과 플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훈련 매뉴얼을 지닌 벤투 감독은 4명의 코치와 함께 자신의 사단을 꾸려 한국에 왔다. 벤투 감독 선임 후 대표팀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손흥민·기성용 등 세계적인 감독들과 함께하는 유럽파들이 인정할 정도의 훈련 내용에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는 전술은 대표팀 내부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무늬만 외국인이 아닌, 커리어와 실제 능력에서 충분히 검증된 인물을 긴 시간 호흡을 맞춘 코치들과 함께 데려온 김판곤 선임위원장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전북도 벤투 감독 선임 방식을 참고했다. 선수 시절 명성과 커리어상의 이력보다는 얼마나 실력 있는 인물인지, 그 내실에 주목했다. 벤투 감독도 한국에 오기 전 브라질·그리스·중국의 프로팀에서 실패의 꼬리표가 달려 취임 당시엔 여론의 반대가 컸다. 하지만 김판곤 위원장은 “감독 본인의 실력보다 여러 환경 요인으로 인한 실패였다. 오히려 감독의 성공 의지를 높여줬다. 그 정도 스크래치는 괜찮다”고 말한 바 있다.
모라이스 감독은 손꼽히는 명장인 조세 무리뉴 감독의 대표적인 오른팔이었다. 인터밀란, 레알 마드리드, 첼시에서 코치로 무리뉴 감독을 도왔다. 무리뉴 감독이 상대 분석과 전술 수립을 맡길 정도로 축구 이론과 훈련 방법의 전문가다. 그러나 감독으로선 성공과 실패가 엇갈렸다. 전북의 백승권 단장은 “모라이스 감독의 이력을 추적했다. 본인도 선수 구성이 좋은 팀에선 성과를 잘 냈다고 했다”고 말했다. K리그에서 압도적인 수준의 스쿼드를 유지할 수 있는 전북과 성향이 맞는 지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감독만 영입하는 것이 아닌, 벤투 사단처럼 복수의 코치를 대동하는 방식도 택했다. 모라이스 감독은 긴 시간 함께해 온 전술 분석을 담당하는 코치 1명과 피지컬 코치 1명을 전북에 데리고 온다. 선수와 코치로서 전북과 10년을 함께한 김상식 코치가 모라이스 감독을 보좌하며 가교 역할을 한다. 한국 축구의 특성과 문화에 이질감을 느껴 실패할 수 있는 외국인 지도자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전북은 모라이스 감독을 통해 프로팀뿐만 아니라 산하 유소년 육성 시스템 등에도 현재 유럽 축구를 선도하는 포르투갈 방식을 접목하기로 했다.
K리그는 주변의 일본·중국의 리그와 비교해도 외국인 감독 비중이 낮다. 2018년에는 대구FC의 안드레(브라질) 감독과 인천 유나이티드의 욘 안데르센(노르웨이) 전 북한 국가대표팀 감독 2명만이 활동했다. 그나마도 안데르센 감독은 이기형 전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며 시즌 도중 선임된 경우다.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농구·배구에서도 외국인 감독을 보기는 어렵다. 한국 프로스포츠계가 전반적으로 감독 선임 시 외국인에겐 문턱이 높다.
‘한국을 모른다’와 ‘선입견이 없다’ 사이
국내 체재와 통역 등의 부가 비용 같은 현실적 문제도 있지만, 그 부분은 의지를 갖고 협의하면 낮출 여지가 충분하다. 오히려 전반적으로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구단들은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외국인 감독들이 ‘한국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임하기 어렵다고 항변한다. 대다수의 한국 선수를 통솔하는 데 소통과 교감에서 애를 먹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다르다. 외국인 감독 선임을 기피하는 그런 명분은 사실상 폐기 수순이라는 것이다. 선수들의 해외 진출과 교류가 활발하고, 문화적으로도 글로벌화된 세대가 많은 선수들은 외국인 감독과도 충분히 잘 소통할 수 있다. 오히려 선수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뿌리박힌 국내 감독들의 리더십에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최근 프로야구 KBO리그에서는 유일한 외국인 감독이었던 트레이 힐만 감독이 SK 와이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의 개방적인 리더십은 오히려 선수들의 잠재능력을 끌어냈다. 신뢰와 감보다는 통계와 시스템에 근거한 정량적 분석으로 정규리그 1위 두산 베어스를 단기전에서 제압했다. 가족 문제로 재계약을 고사했지만 2016년 6위, 2017년 5위에 그쳤던 팀을 정상까지 이끈 것은 외국인 감독의 편견 없는 선수 선발과 기용, 데이터에 근거한 신뢰에 있었다.
K리그도 하위권 팀인 대구와 인천이 두 외국인 감독의 역량에 힘입어 목표 이상을 달성했다. 대구는 시즌 중반까지 최하위를 맴돌았지만 후반기에 반전에 성공하며 리그 7위를 달성했고, FA컵 결승까지 올랐다. 인천은 안데르센 감독이 팀 전체에 강한 동기 부여를 심어주며 강등 위기를 이겨냈다. 과거에도 포항 스틸러스의 세르지오 파리아스(브라질) 감독과 FC서울의 세놀 귀네슈(터키) 감독이 유의미한 결과를 낸 바 있다. 파리아스 감독은 스타는 적지만 강한 조직력의 팀으로 변모시키며 모든 트로피를 들었다. 귀네슈 감독은 어린 선수들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며 쌍용(이청용-기성용) 열풍을 이끌었다.
전북의 모라이스 감독 선임은 외국인 감독에게 유달리 높은 국내 스포츠계의 문턱을 낮출 수 있는 또 한 번의 중요한 기회이자 도전이다. 전북이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것은 물론 팀의 시스템도 선진화시키겠다는 목표를 달성한다면 토종 감독 일색인 프로스포츠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