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지연·혈연·학연보다 중요한 후지오리 보존회 동무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것을 알게 됐어요. 그 인연으로 지금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고 있는 거랍니다.”
후지오리(藤織·등나무에서 섬유질을 추출해 실을 자아 베 짜기)를 하게 된 계기가 뭐냐는 질문에 이와마 도시오(岩間利夫·85)씨는 그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베 짜기로 일본에서 가장 인정받는 장인들이 모여 문화재급 기모노(着物·일본 전통 옷)를 만드는 니시진의 유명한 곳에서 오비(帶·전통 옷의 허리띠로 화려한 것이 특징)를 짜는 장인입니다. 2년 전 일왕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분으로, 아직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베 짜기를 하거나 전통 옷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구름 위의 존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소탈한 모습으로 후지오리 강습회에 나타나 교육을 하는 강사를 도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그 자리를 더욱 훈훈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처음 온 게 31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정년퇴직해 집에만 있는 남편을 보고 자연과 접하면서 잡념을 삭여야 한다는 생각에 왔어요”라고 말하는 60대 여성은 저녁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가장 밝게 해 주는 분으로, 이곳에 다닌 지 벌써 8년째입니다. “예전부터 강습을 받고 싶었지요. 우리 손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베 짜기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아이를 기를 때는 엄두도 못 내고, 아이를 길러내니 이번엔 시부모님 병간호로 못 나왔지요. 이제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왔어요.” 올해 34기생으로 들어온 60대 여성이 이곳에 오게 된 동기입니다.
이와마 장인처럼 베 짜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직종의 사람도 더러 있지만 천연염색을 하는 사람, 전통 종이뜨기를 하는 사람, 디자이너, 대죽공예가 등 손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많았습니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수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등나무를 만져 실을 자아내고 베틀로 베를 짜면서 교류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60대 이상 초기 강습생이 후지오리 보존 주축
보존회가 작성한 34년간의 강습자 명부를 보면 주소지가 동(東)에서 서(西)까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연령층도 다양합니다. 이와마씨처럼 80대가 가장 윗선배가 됩니다. 밑으로는 20대도 있는데,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복식(服飾) 학원을 나와 니트 제조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답니다. 원래 텍스타일에 관심이 많았기에 베 짜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에서 실을 자아내는 과정부터 베 짜기까지 전 과정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왔다고 합니다.
후지오리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데 가장 주축이 돼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은 역시 60대 이상의 초기 강습생들입니다. 강사로 모두가 의지하는 분들은 놀랍게도 30년 이상 매달 만난다고 합니다. 1기생 중 한 분은 “아이를 낳고 얼마간은 못 나온 적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가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는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놀게 하고 등나무를 채집하러 가곤 했어요”라고 회상합니다. 이제는 70대가 된 그녀가 젊은 아낙 때 이야기를 하자 함께 있던 1기생 분들이 훌쩍 그 시절로 넘나들 듯 추억을 쏟아냅니다.
30대 젊은 부부는 후지오리 강습회를 다니다 이곳으로 아예 이사를 했습니다. 지난번 글에도 전했습니다만, 마을 가구가 열 가구인데 다섯 가구가 시골 생활을 하겠다고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타지 출장으로 만나지 못했는데 보존회 회장을 하고 있는 이노모토(井之本·68)씨 역시 12년 전 후지오리를 하던 인연으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당시 학생이었던 딸이 결혼해 남편과 함께 이 마을로 들어와 살고 있으니 후지오리가 사람을 불러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후지오리가 생업이 되진 못합니다. 손이 많이 가고 귀한 것이기에 하나하나의 작품은 고가지만 일정한 수입을 얻기 어렵고, 이곳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생업수단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30년, 20년, 10년 동안 이곳을 다니면서 그들은 무엇을 얻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일본 최고의 베 짜기 장인 이와마씨는 말합니다.
“분업화된 사회에서 산에 가서 나무를 거둬 와 실을 만들고, 그리고 그 실로 베를 짠다는 것은 너무너무 흥분되는 일이었어요.”
후지오리 보존회를 만나면서 그는 일의 태도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예전엔 제작 과정에서 자신이 맡은 부분(오비를 짜는 일)만 생각했는데 그 후로는 배달된 실을 보면 실 자은 장인의 솜씨가 보이고 어떤 흐름으로 작업이 진행되는지 전체 과정을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또한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지요, 사람.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개성이 있고 유쾌합니다. 그래서 사람 보러 오게 되지요.”
제가 이틀에 걸쳐 함께 작업하고 식사하고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는 체험으로 느끼기에도 그게 정답인 듯 보였습니다. 80세가 넘은 이와마씨는 80세가 된 1기생과 3시간 이상 걸리는 교토 시내에서 강습회 때마다 옵니다. 비교적 가까이에 살고 강사로 봉사하는 1기생 분들도 굽이굽이 굴곡진 현실을 엮어가면서 30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때로는 아이 양육이나 시부모 간병으로 못 나올 때도 있지만 거꾸로 이곳에 나오기 위해 더 열심히 일상을 보낸 시절도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센다이에도 강습수료자가 3명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두 분과 연락이 닿아 들어보니 한 분은 78세로 60세가 되기 직전에 비행기와 전철, 버스를 이어 타고 강습이 있는 곳에 매달 다녔다고 합니다. 한 분은 올해 90세로 14년 전에 밤새워 야간 버스를 타고 강습을 1년간 다녔다고 합니다. 후지오리 보존회에 다녀왔다는 것만으로 두 분은 오래전 헤어졌다 만난 친구를 대하듯 경계심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숨겨놓고 있던 감정까지 내비치는 듯한 무방비 상태의 응대를 제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가 참 행복하고 가슴 떨리던 때라며 90세의 아오누마(沼)씨는 파르르 눈가에 파동을 보이며 즐거워했습니다.
일본의 인류학자 요네야마 도시나오(米山俊直)는 일본 사회는 혈연, 지연보다 나카마(仲間·일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동무 내지는 결사)가 더 중요한 사회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게 나카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훈장 받을 수 있었다”
지연, 혈연, 학연과 관계없이 후지오리가 중요다고 생각하거나 흥미롭다고 느낀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모여 보존활동을 하면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걸 계속 이어가면서 나카마가 돼 가고, 그 안에서 나라가 인정하는 장인이 태어나고, 그 성장을 함께 봐온 친구들이 그곳에 있는 것이지요. 이게 나카마입니다. 이와마씨는 말합니다.
“내 일에 대한 모티베이션을 가장 깊이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후지오리 나카마지요. 그래서 난 다른 어떤 모임보다 이곳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30년 지나도록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던 날 가장 기뻐해 준 사람들이 이들이고 그 훈장은 이들이 있었기에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업적을 인정받는 장인이나 학자들은 항상 나카마 덕택이라는 인사말을 합니다. 그들이 같은 직종의 성원이 아니어도 나카마가 되는 비법은 같은 뜻을 갖는 것과 긴 시간 사귐을 이어가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원 시절 이론으로 배웠던 ‘나카마론’이 후지오리 보존회 분들을 통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일지 몰랐습니다. 상상외의 큰 수확을 거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