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시들, 중국에서는 통할까
미국 사로잡은 ‘슈퍼 리치 아시안’
영화는 뉴욕에 사는 젊은 여성 레이첼(콘스탄스 우)이 남자친구 닉 영(헨리 골딩)을 따라 그의 고향인 싱가포르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닉의 막역한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알고 보니 닉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부유한 부동산 재벌 집안의 아들. 일거수일투족이 사교계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 집안답게 레이첼의 등장에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한 이민자로 자란 레이첼은 자신의 출신 배경에 떳떳하지만, 점차 사람들의 질투와 더불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닉 영의 어머니 엘레노어(양자경)의 차가운 태도에 지쳐간다.
이 영화의 모든 주요 배역이 동양인 배우들로 캐스팅된 것은 일대 사건이다. 이 직전 사례는 웨인 왕 감독이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인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조이 럭 클럽》(1993)이다. 주요 캐스트 전체가 아시아계 배우들로 구성된 할리우드 영화를 다시 만나기까지 자그마치 25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지난 8월15일 북미에서 개봉해 첫 주 흥행 수입으로만 3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다. 첫 주 관객의 44%는 아시아계 관객이었다. 하지만 둘째 주부터 아시아계 관객 비중은 20%대로 떨어지고, 인종과는 상관없이 이야기와 재미에 반한 관객들의 발걸음이 주를 이뤘다. 미 언론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가 통했다고 분석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다양한 문화 배경을 지닌 인물을 내세운 점이 통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슈퍼 리치’ 캐릭터 묘사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견고한 편견을 바꿔놓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극장 흥행 수입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워낙 크고, 미국 거대 극장 체인을 중국 기업이 인수하는 등의 상황들을 볼 때 할리우드에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미 크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 영향력이 발휘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액션 영화의 조연 캐릭터를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하거나 일부 로케이션을 아시아에서 진행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이 영화는 다르다. 첫 장면, 런던의 최고급 호텔에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쫓겨난 엘레노어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그 호텔을 통째로 사버린다. 등장인물들의 생활과 그들이 즐기는 파티를 더는 호화로울 수 없는 모습으로 그린다. 가난한 이민자 집안의 딸인 레이첼조차 뉴욕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는 ‘엘리트’다.
당초 넷플릭스가 거액을 내세우며 제작과 배급권을 넘겨줄 것을 제안했지만, 영화를 연출한 존 추 감독은 이를 거절하고 극장 배급을 택했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배급과 마케팅 지원을 받으며 이 사례가 할리우드의 전통 플랫폼인 극장 상영의 성공 사례로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시기 극장가에서 존 조 주연의 《서치》와 넷플릭스 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동시에 사랑받은 점도 중요하다. 두 작품 모두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미 언론은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을 일컬어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퍼진 ‘Asian August’(아시아계 배우들이 8월을 점령했다는 뜻) 해시태그 현상을 앞다퉈 보도했다. 2년 전만 해도 《닥터 스트레인지》와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등의 캐스팅에서 불거진 ‘화이트 워싱’(아시아인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에 반대하며 벌어진 해시태그 운동인 ‘StarringJohnCho’(블록버스터의 주요 배역에 존 조를 캐스팅하라)에서 더 나아간 열풍이다. 또한 당분간 이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보도가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흥행 성적 저조
실제로 향후 선보일 아시아계 배우 주연 프로젝트도 다수다. 디즈니의 실사 프로젝트 《뮬란》, 뉴라인과 워너브러더스가 손잡고 선보이는 로맨틱 코미디 《싱글즈 데이(Singles Day)》, 아시아계 스탠드업 코미디언 앨리 웡이 주연한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올웨이즈 비 마이 메이비(Always Be My Maybe)》 등 라인업이 빼곡하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역시 북미 개봉 일주일 만에 바로 속편 계획을 발표했다. 원작인 케빈 콴의 동명 소설이 총 3편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속편의 각본은 소설의 2편 《차이나 리치 걸프렌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한 버전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흥행 화력을 불태운 할리우드와 달리 한국에서는 흥행 성적이 저조하다. 개봉일인 10월25일 박스오피스 3위로 출발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개봉 둘째 주 주말까지 15만 명 정도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재벌 집안의 백마 탄 왕자와 신데렐라 그리고 그를 받아들일 생각 없이 냉랭하기만 한 ‘시월드’ 이야기. 할리우드에는 신선한 충격이었겠지만, 소위 막장드라마의 법칙이 견고하게 존재하는 한국에서는 이것이 몹시 평이한 흐름처럼 받아들여진 결과다. 심지어 예비 시어머니의 못된 훼방이라기엔 엘레노어는 너무 우아하기까지 한 캐릭터다. ‘싱가포르 여행 홍보 영상 같다’는 관객 평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아시안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 캐릭터로 캐스팅과 역할이 한정됐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로 보인다. 실제로 영화가 공개된 후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에서 중국계 인종만 부각시킨 것은 주류 대중문화에서 중국이 가지는 기존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골자다. 싱가포르 정치학자 이안 정 등 비평가들은 “이 작품은 싱가포르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모조리 지우고 부자이며 특권을 얻은 소수 민족을 지지한다”고 비판했다. 한국계 미국인 배우 제이미 정은 이 영화의 출연을 원했으나 “중국계 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밝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11월30일 중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아시안 인베이전’은 중국 시장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12월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