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궐》이 무색무취 좀비 영화인 이유
국내에서 좀비물은 《부산행》(2016)에 이르러서야 그 가능성을 확인받았지만, 할리우드에서 좀비는 일찍이 그 상업성을 인정받은 캐릭터다. 조지 A 로메로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 좀비 개념을 재정립한 게 시발점이었다. 둔하고, 지능이 낮고, 인육을 탐하며, 결정적으로 느릿느릿한 면모를 지닌 좀비는 현대인을 은유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좀비는 좀비처럼 죽지 않고 변형을 거듭하며 영화 안에서 지분을 늘려왔다. 비실거리며 걷는 좀비의 특성은 대니 보일의 《28일후…》(2002)에서부터 빠르게 달리는 좀비로 능력을 업그레이드했고, 급기야 인간 감정이 남아 있는 좀비(《나는 전설이다, 2007)》), 웃기는 좀비(《좀비랜드, 2009》), 사랑에 빠진 좀비(《웜 바디스, 2013》) 등이 등장했다.
특히 좀비의 ‘속도 향상’은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요소였다. 브래드 피트가 제작을 맡아 크게 흥행한 《월드워Z》(2013)가 대표적이다. 해당 영화의 좀비 ‘쓰나미’ 신은 좀비물이 B급 장르물에 머물지 않음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역시 ‘달리는 좀비’를 더 빨리 달리는 KTX 안에 가둬놓고 가속도를 획득해 낸 경우다.
그리고 《부산행》이 열어젖힌 한국형 좀비물의 생명 연장을 가늠하게 할 두 개의 프로젝트가 있다.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방송될 김성훈 감독(《터널》 연출)의 《킹덤》과, 《부산행》을 만든 NEW가 투자하고 김성훈 감독(《공조》 연출)이 연출한 《창궐》이다. 《킹덤》이 12월 방영을 예고한 가운데, 《창궐》이 먼저 대중 앞에 섰다. 과연 《창궐》은 한국 좀비물의 인공호흡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조선 시대로 간 좀비, 그러나…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 병조판서 김자준(장동건)의 계략에 세자가 죽음을 맞자, 청나라에 있던 강림대군 이청(현빈)이 돌아온다. 이청이 도착했을 때 제물포는 이미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야귀(좀비)가 들끓는 상황. 이청은 우연히 만난 무관 박종사관(조우진) 일행과 함께 좀비 소탕에 나서고, 간신 김자준은 권력을 얻기 위해 야귀 떼를 이용하는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
‘조선 시대로 간 좀비’ ‘조선판 《부산행》’. 《창궐》 제작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따라붙은 수식어들이다. 관객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자극한 것 역시, 이 부분. 밤에만 출몰하는 야귀, 좀비의 특색이 사극 안에서 어떻게 구현됐을지에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결과물은 예상 밖이다. 놀랍게도 《창궐》은 좀비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은 영화로 보인다. 사극과 좀비물의 창의적인 교배라기보다, 정치사극에 좀비가 양념으로 얹혀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좀비가 조선에 들어온 경위와 첫 감염자의 동선을 숙제 해치우듯이 소개하며 문을 연다. 좀비와 이청, 박종사관 일행이 처음 만나 제물포 안에서 펼쳐는 화려한 액션 장면이 초반 눈길을 끈다. 그러나 《창궐》의 좀비들은 우리가 무수히 봐왔던 좀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극 안에서 좀비가 보여줄 수 있는 그만의 특징이 시도조차 되지 않은 탓에 좀처럼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관절을 꺾으며 좀비로 변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긴 하나 《부산행》에서 이미 소개된 특징이라 그리 인상적이진 않고, 좀비들의 액션 운용도 단조롭게 반복되다 보니 장르영화로서의 에너지가 옅다. 한마디로 《창궐》의 좀비들은 무색무취다. 인간들과 좀비들의 다툼도 별다른 아이디어 없이 관성적으로 흐르다 보니, 스릴과 긴장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좀비’보다 최근 충무로 ‘사극’ 장르가 빠져 있는 어떤 전형성에서 더 크게 발견된다. 여러 좀비물이 그러했듯, 《창궐》은 정치적 문제를 은유로 내포하려 하지만, 그것이 너무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이라 촌스럽다. 설익은 교훈과 예상 가능한 메시지와 감정의 도열이 이어지는 가운데, ‘설마’ 했던 촛불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러려고 왕이 됐냐” 등의 기시감 넘치는 대사도 현실에서 이미 상투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라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각에서 《창궐》을 《물괴》와 비교해 거론하는 것은, 합당하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권력에 눈이 먼 위정자가 괴생물체를 이용해 민심을 흔들고 영웅이 이를 막아낸다는 점에서, 《창궐》은 확실히 《부산행》보다 《물괴》와 더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물괴》가 그랬듯, 최근 한국 사극의 악습을 되풀이하는 것 또한 닮았다.
너무 빤한 캐릭터 조형술
《창궐》은 장동건과 현빈이라는 피사체를 어떻게 하면 더 매혹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에 꽤 신경을 쓴 티가 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합은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인상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이 영화의 캐릭터 조형술은 너무나 빤해서 거론하는 것 자체가 살짝 힘이 빠진다. 주인공 옆에 붙어 있는 코믹 캐릭터(정만식), 의무방어 느낌으로 무리에 끼워넣은 여성 캐릭터(이선빈), 그 와중에 다소 묵직함을 소화하는 든든한 인물(조우진)까지. 《부산행》의 많은 캐릭터 역시 스테레오 타입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영화에는 마동석이 연기한 상화라는, 귀여움과 든든함을 겸비한 흥미로운 캐릭터가 있었다. 그러나 《창궐》엔 상화 같은 독보적인 매력의 인물도 찾기 힘들다.
이 영화는 사실상 강림대군의 성장기다. 정치에 무심하고 놀고먹는 게 가장 행복한 철부지 왕자가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고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면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할까. 이 부분에서 영화는 좀비 영화의 특성을 이용하려 하긴 한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시체인, 좀비. 좀비가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연인, 친구, 가족이 좀비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매정하게 죽일 수 있는가. 강림 역시 이러한 딜레마에 놓인다. 그러나 그 고뇌가 얕게 전시되고, 관계 구축 또한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지기에 주인공의 변화는 설득력을 입지 못한다. 이 영화의 비겁함은 실컷 슈퍼히어로로 주인공을 그려놓고는, 뒤늦게 이 모든 게 백성 덕분이라며 재빠르게 ‘촛불’에 공을 넘기는 태도다.
결과적으로 《창궐》은 좀비물과 액션영화와 정치사극 사이에서 좀비처럼 내내 어슬렁거리다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획득하지 못한다. 사극과 좀비의 결합이 보여줄 수 있는 안 좋은 용례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