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14화 - 제국주의 박람회의 두 얼굴
산업혁명 이후 인류문명과 외국문화를 경험할 '구경거리'는 단연 박람회였다. 이곳에서는 문명의 발전과 그것이 몰고온 삶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전화, 텔레비젼, 엘리베이터 등 인류 최고의 발명품들이 처음 세상과 만난 공간이었고, 풍물 전시관을 통해 미지의 대륙을 엿볼 수 있었다. 서구문화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에펠탑 역시 박람회를 빛내기 위해 세워졌다.
근대 박람회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식민제국 영국에서 1851년 막을 올렸다. 거대한 기계문명과 경이로운 건축물들이 런던으로 모여든 관람객을 압도했다. 또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식민지 곳곳의 풍물을 한데 모은 지구촌 전시관은 제국의 위용를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이같은 런던 박람회의 대성공은 영국과 식민지 각축전을 벌이던 프랑스에 큰 충격을 주었다. 4년 뒤 나폴레옹 3세는 파리에서 박람회를 열었고, 이후 프랑스는 11년을 주기로 무려 5차례나 연거푸 개최하게 되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과 살아있는 '인간'을 함께 전시한 제국주의 시대 박람회
하지만 의욕이 앞선 탓인지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박람회장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전시'한 인종관이었다. 1878년 파리박람회에서는 '검둥이촌'이 세워져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데려온 흑인 400여명을 전시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1889년 박람회 역시 흑인들을 울타리에 가둬놓고 '미개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식민지관이 마련됐다. 더구나 세기의 전환기인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박람회에서는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남미, 아시아의 인종, 풍물관까지 세워져 내부에서도 비판론이 제기될 정도였다
눈여겨볼 건 제2회 올림픽이 박람회의 부대행사로 치러진 점이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그당시 올림픽과 박람회는 행사의 격(格)이 달랐다. 1900년 박람회는 국가적 행사로 관람객만 해도 연인원 5000만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렇다 보니 쿠베르탱 올림픽위원장도 박람회 주최 측에 사정하다시피 해서 겨우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부대행사여서 개막식도 없었고 올림픽이란 명칭도 사용하지 못했다. 아무튼 한쪽에서는 살아있는 '인간'을 전시하고 다른 쪽에서는 '국제친선과 평화의 제전' 올림픽을 개최한 사실은 제국주의 박람회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박람회는 19세기 말 대서양을 건너 신흥강국 미국으로 옮겨졌다. 1893년 아메리카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시카고에서 열렸다. 이 박람회는 알래스카를 사들인 미국이 태평양 너머로 진출하려는 팽창주의 욕망을 한껏 드러낸 자리였다. 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박람회이기도 했다. 우리 대표단은 20평 남짓한 공간에 기와 지붕을 올려 전시관을 짓고 가마와 도자기, 부채 등 민예품들을 전시했다. 물론 전화, 영사기, 에스컬레이터까지 등장한 열강들의 전시물에 비하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한 철도회사 간부가 전시관 입구에 걸린 태극기 문양에 '꽂혀' 이를 회사 로고로 채택했다. 그러다 보니 미대륙 1만여km를 동서로 횡단하는 이 회사 열차들은 태극문양을 달고 달렸고, 이 문양은 자연히 미국 철도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의 첫 박람회 참가는 미 대륙에 우리의 이미지를 알리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작년 8월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도운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가 고안한 거북선 모형이 공개된 적이 있다. 꽤나 정교하게 제작된 이 모형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왜적을 격퇴한 거북선을 통해 일제의 침탈 야욕을 고발하고자 한 듯 했다. 비록 국내외 어려운 사정 때문에 참가가 좌절됐지만, 박람회에서도 암울한 우리 현실을 알리려던 대한제국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든 일본도 서구 열강에 뒤질세라 박람회 개최에 열을 올렸다. 원래 남의 것을 베끼는데 익숙한 이들은 서구 박람회의 전시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다. 1903년 오사카 박람회장 입구에 파리박람회를 본뜬 인종 전시관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타이완을 비롯해 청나라, 조선, 류큐, 사할린, 말레이 반도에서 온 28명의 이민족이 전시되었다. 그런데 개관을 앞두고 소동이 일어났다. 청나라에서 자국민 전시에 대해 항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자 주최 측은 전시관 앞에 '학술'이란 명칭을 슬쩍 끼어놓고 인류학 연구 목적의 행사로 위장하는 꼼수를 부렸다.
개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조선과 류큐가 일본 외무성에 항의했다. 두 나라에서 자국민 전시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게 되자 일본정부는 병합을 앞둔 대한제국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 2명을 철수시켰다. 한데 오키나와섬 원주민인 류큐인들의 항의 내용이 좀 뜨악했다. 이들은 "일본에 병합된 지 오래 됐으니 타이완이나 아이누족과 달리 취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인간 전시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스스로 일본 국민으로 '대접'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일제는 한 전시관에 여러 이민족을 수용한데서 터져나온 불만이라며 오히려 인종 전시장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12년 도쿄에서 열린 척식박람회에서는 식민지마다 별도의 전통가옥을 지어 '토인부락'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타이완 토착부족, 사할린과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길랴크족, 오롯코족 등 식민지인 17명이 실제 사는 모습을 재현했다. 사실 이런 류의 전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 각지의 민속촌이나 테마파크에서 특정한 민족 집단에 속하는 남녀가 전통 노래와 춤, 의식주, 혼례 등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과연 이런 전시와 당시의 인간 전시는 어떤 차이가 있는걸까?
이에 대해 일본의 마쓰다 교코는 '식민지 표상과 인간 전시'라는 논문에서 "당시 박람회에 전시된 사람들이 반강제로 동원됐다는 점에서 지금과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야만인들의 교화'라는 전시 주제를 정해 타인종을 비하하고 자국민들의 우월감을 고취시킨 사실도 차이점으로 지적했다. 이렇듯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인간 전시에는 인종적, 문화적 '차이가 아닌 우열'을 가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인종적 우월성과 함께 군국주의적 침략야욕도 드러낸 일제 박람회
거기에다 일제의 박람회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군국주의적 야욕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요컨대 필자가 척식박람회 기록물에서 주목한 것은 타이완관 사방에 그려진 높이 7m, 길이 145m의 초대형 벽화였다. 여기에는 타이완의 '눈부신' 산업발전 상황과 일제가 원주민 마을에 철조망을 치는 '양극단'의 장면이 함께 묘사되었다. 당시 타이완 북부지역에서는 특히 타이야르족의 항일 투쟁이 극심했다.
실제로 타이완 총독부는 이 부족의 거주지를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차단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다. 결국 이 벽화에는 식민지인에게 '절대복종 아니면 죽음'을 강요하고, 식민지 근대화란 침략과 수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하단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해방을 맞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를 이뤘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정녕 제국주의자들이 '노린' 것은 미개한 민족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풀기 위함이었을까? 박람회 역사는 그 답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