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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못 믿고 점점 기계에 의지하는 ‘저신뢰 고비용 사회’의 도래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로 19세기인의 심금을 울렸다. 2030년에 햄릿을 각색한다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미래 햄릿은 “사람을 신뢰할 것인가, 기계를 믿을 것인가”라고 묻게 될 것이다.


19세기에 태어난 자동차수리공 A씨에게 있어 기계란 ‘액셀러레이터를 깊숙하게 밟으면 속도를 올리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멈춘다’와 같이 간단했다. 더러 급발진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A씨에게 20세기 기계는 인간이 부여한 규칙에 따라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다. 당시 대부분의 위협은 인간들로부터 왔다. 수집된 데이터를 자기 입맛대로 고쳐 국민을 설득하거나, CCTV를 교묘하게 편집해 재가공하는 식이다. 이처럼 신자본주의로 명명된 과거는 인간의 탐욕과 실수로 점철된 시대였다. 바로 ‘공유지의 비극’이다. 


공유지란 넓고 푸른 초원으로, 1000여 마리의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고 살 수 있는 공동 구역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욕심을 부려 더 많은 양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양의 숫자가 5000여 마리에 달하자, 목초지는 헐벗어지고 공유지에는 양들의 배설물만 가득했다. 결국 모두가 푸른 초원에 양들을 키울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19~20세기는 인간의 탐욕이 부른 ‘공유지의 비극’을 막기 위해 법과 규범을 정비해야 했다. 미래에는 인간의 탐욕이 공유지의 비극에 이어 ‘공유경제의 몰락’을 불러올 것이다.

 

 


미래, ‘공유경제의 몰락’ 불러올 수도

 


2030년, 자동차수리공의 아들인 K군은 직장을 구하는 대신 ‘공유경제’를 활용한 사업을 기획했다. 우선 K군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 그리고 제품을 공유해 그 수익을 얻는 것이다. 공유경제는 대량생산 시대에 재화를 모두 소유해야 했던 이들이 ‘실제 소유한 차량과 집을 이용하는 시간이 적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통상 우리는 집에서 밤에만 잠을 자니, 주중에는 오전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비어 있다. 24시간 중 50%에 가까운 공실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년에 2만km 남짓 운전하는 K군의 차량은 출퇴근 시간 2시간 남짓을 빼면, 하루 22시간은 주차장을 지키고 있다.


이런 계산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면, 대량생산·대량소비를 위해 혼자 독식한 자원은 대부분 주차장에서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는 셈이다. 공유경제는 이런 비효율을 개인들이 나눔으로 해결하는 접근방법인데, 2010년대에 집을 빌려주던 ‘에어비앤비’와 차를 빌려주던 ‘우버’로 유명하다.


이렇듯 2030년에는 집·차뿐만 아니라, 책과 노트북 그리고 세탁기 등 여러 가지가 공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심지어 기억과 체험, 그리고 이야기도 공유의 대상이다. 누구든지, 주변의 주인이 있는 물건을 사용하고 제자리에 두면 된다. 사물인터넷으로 모든 개인 물건은 소유주(ID)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유의 대상(모니터링 가능)이 된다. 공유된 물건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쓸 때, 활용할 수 있는 공유 쿠폰이나 사이버머니, 또는 현찰로 그 대가를 받는다. 따라서 2030년 시민은 집을 사든, 차를 사든, 노트북을 사든, 게임기를 사든, 옷을 사든, 마음만 먹으면 사는 즉시 모두 그 물건을 통해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셈이다.


2030년, 우주개발과 심해개발 광고가 끊이지 않아도 K씨는 자기 몸 하나 눕힐 공간 찾기가 녹록지 않다. K씨는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과 인공지능으로 더 비싸진 자율주행차 할부를 갚기 위해 부업(공유경제를 활용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과거 2010년 전부터 시작된 공유경제는 부쩍 어려움에 처해 있다.


청년 창업을 생각 중인 K씨는 자신의 차량을 우버에 등록하기도 전에 택시 조합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자신의 집을 외국인 친구나 내국인에게 단기 임대를 줄 경우에는 호텔 사업자들의 신고나 조직적인 진정을 해결해야 했다. 이들 업종은 18세기부터 성업했고, 20세기에는 호텔 체인점 등 규모와 범위의 경제를 이룬 막강한 이익집단이기 때문이다. 2030년에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공유경제의 효율보다는 부작용을 더 강조한 탓이다. 공유경제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호텔과 택시 사업자들은 공유경제가 신뢰할 수 없는 서비스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공유경제의 효율보다 자본가의 이익 앞서


과거 서부 개척 시대에는 권총이나 무기가 없음을 ‘악수를 함(빈손임을 증명함)’으로써 해결했다. 신뢰란 19세기부터는 계약을 통해 발전했다. 20세기부터는 CCTV로 완성됐는데, 경찰과 법원은 증거로 동영상 자료를 최우선으로 신뢰했다. 거짓말 잘하는 사람의 말보다 CCTV나 자동차 블랙박스에 녹화된 동영상 자료만을 믿는 풍토가 생긴 것이다. 동영상 증거가 없으면 법원과 경찰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수사해야만 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이다. 즉 누구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면 동영상이 있어야 했다. 동영상을 제출하기 전까지 누구도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 이제 낮은 신뢰의 문제 해결을 인공지능에 맡기게 될 전망이다. CCTV 자료가 없으면 법원과 경찰이 누구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향후 인공지능은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 갈 것이다. 인공지능이 내린 판단을 법원과 경찰 역시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결과로 경찰 수사와 법원의 판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 과연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회적 갈등을 모두 다 중재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자율주행차량의 인공지능은 ‘운전자 1명과 보행자 10명 중 어느 한쪽을 죽게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신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가혹한 결정은 스스로 학습한 인공지능의 몫이다. 인공지능이 곧 ‘복불복’인 셈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시대가 온 것은 기술을 도구적으로만 활용하고 의존하는 관행 때문이다. 기술이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물적 토대를 바꾸고 있는데도, 물적 토대와 이에 따른 사회변화를 간과한 탓이다. 시민은 동영상 증거와 인공지능의 판단을 쉽게 신뢰하고, ‘인간이 인간을 신뢰’해나가는 방법과 노력에는 소홀했다.


최신식 호텔과 보안장비를 갖춘 방이 ‘평범한 개인의 초라한 집에서의 하룻밤’보다 안전상 훨씬 더 믿을 만하다고 쉽게 단정한 것과 같다. 공유경제는 신뢰의 문제이다. 19세기적 세월의 때가 묻은 거대자본과 권력이 프로그래밍한 인공지능은 공유경제의 효율보다 자본가와 권력자의 이익이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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