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거라는 방식을 넘어서) 정치 참여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시도에 회의적이다. 선거 참여가 아주 평등하지는 않다고 해도, 결국 선거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가장 평등한 정치 메커니즘이다. 정치 참여의 범위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 참여에 쓸 자원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참여는 평등할 수 없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로) 효과적일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선거를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지난 7월 국내에 번역 출간된 미국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의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나오는 말이다. 왜 14년 전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번역서가 나오게 되었을까? ‘옮긴이 후기’는 12쪽에 걸쳐 책의 내용을 잘 해설했지만, 그런 이야긴 없으니 내 상상력을 발휘해 말씀드려 보련다. 이 책의 뒤늦은 국내 출간이 오히려 시의적절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한계에 대해 잘 알게 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80년대까지의 40여 년간 민주주의는 한국인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민주주의는 그 시대에 진짜 종교였다.
민주주의 종교 체제하에서 ‘참여’는 신성한 단어였다. 독재권력의 탄압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회·시위 참여뿐이었기 때문이다. 참여라는 단어가 얼마나 신성했으면, ‘참여정부’니 ‘참여연대’니 하는 작명이 나오고 그 이름이 빛을 발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계속 참여를 추앙해야 하는가? 문화적 습속엔 나름의 관성이 있는 법이어서 그런 추앙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이젠 진실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참여의 특권화’와 ‘참여의 불평등 유발’을 우려하고, 민주주의를 “정당들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어야 하는 체계”로 정의하면서 ‘민주주의의 탈신비화’를 시도한 셰보르스키는 참여 예찬자들에게 낡은 꼰대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참여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부르짖으면서 그게 이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과장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게 아닐까?
‘참여의 환상’에 속지 말자. 그간 참여를 선동해 얻은 결과가 무엇인가? 팬덤정치의 창궐 아닌가? 그런 정치의 포로가 된 정치인들이 모인 국회를 보자. 최근 발표된 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분야별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국회가 압도적 꼴찌를 차지했다. 74.1%가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욕하면서 배운 걸까? 응답자의 절반 이상(58.2%)이 정치 성향이 다르면 연애나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으니, 국회만 탓하기도 어렵게 됐다.
참여 예찬자들에게 꼭 던져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누구의 참여를 말하는가? 당신 진영 사람들의 참여를 말하는 게 아닌가? 당신은 정녕 진영을 초월해 상대편 진영 사람들의 참여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진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편의 병력 수를 늘려야 한다는 승리 지상주의가 당신의 속셈 아닌가? 시위가 두 진영으로 나뉘면 양쪽이 누가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았는가 하는 경쟁을 하는 건 한국 사회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승자 독식을 위한 정쟁용 참여는 이제 그만하자.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참여의 기존 문법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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