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동메달리스트 박혜정·허미미·신유빈·김우민 “LA에선 더 높이”
단체전 금 목에 건 김제덕·도경동은 ‘개인전 금 도전’
중학교 1학년 때 역도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의 현역 시절 영상을 본 후였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포스트 장미란’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다짐은 이랬다. ‘첫 올림픽에서는 메달 획득, 두 번째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수확.’
그리고 박혜정은 첫 올림픽에 나섰다. 목표대로 메달(은)을 땄다. 다음 올림픽 타깃은 바람대로 ‘금메달’이다. 자타 공인 ‘역도 요정’으로 불리는 그는 8월12일(한국시간) 막을 내린 2024 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kg 이상급 경기에서 인상 131kg, 용상 168kg, 합계 299kg을 들어올렸다. 합계 309kg을 기록한 세계랭킹 1위 리원원(중국)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지난 4월 태국 푸껫 국제역도연맹(IWF) 월드컵에서 세운 자신의 한국기록(296kg)보다 3kg을 더 들었다.
박혜정의 나이 아직 21세. 도쿄올림픽에 이어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리원원은 24세로, 이번 대회 기록이 도쿄 때(합계 335kg)보다는 줄었다. 신계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느낌이다. 박혜정 또한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운동하면 차근차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 4년 후에는 금메달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박혜정은 올림픽 전에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역도에 진심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밝고 긍정적 모습으로 ‘해피 바이러스’ 전파
박혜정처럼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4년 후가 더 기대되는 재기발랄, 유쾌·상쾌 선수들이 꽤 있었다. 허미미(유도), 신유빈(탁구), 김제덕(양궁) 등이 그들이다.
허미미(21)는 유도 여자 57kg급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한국 유도가 파리올림픽에서 처음 딴 메달이었다. 여자 유도에서는 2016 리우올림픽(48kg급 정보경) 이후 8년 만에 시상대에 올랐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허미미는 “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나가서 금메달을 따기를 바란다”는 한국 국적의 할머니 말씀에 따라 한국 국적을 택했다.
고교 1학년 때 재일동포 대표팀으로 전국체전 참가를 위해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인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점점 한국어가 늘었다. 열심히 애국가 가사도 외웠다. 파리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 시상대 위에서 따라 부르고 싶었는데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와의 결승에서 지도 3개로 반칙패를 했다. 이 판정은 경기 이후 여러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했으나 허미미는 내내 미소를 보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태극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감동하셨을 것 같다”면서 “그래도 자랑스럽다. (할머니에게) 오늘까지 유도 열심히 했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허미미는 2021년 한국 국적을 따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 선생의 내손녀(5대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허석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항일 격문을 붙이다 옥고를 치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은메달을 딴 허미미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허미미의 동생, 허미오(19) 또한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현재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둘 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기도 하다. 2021년 일본 고교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고교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던 허미오는 2028년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언니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LA올림픽 때는 자매 유도 선수가 같이 메달을 따는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유빈(20)은 파리올림픽에서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했다. 개막 다음 날(7월27일)부터 15일 동안 단 하루만 빼고 혼합복식, 개인전, 단체전을 연달아 치렀다. 모두 14경기를 소화했는데도 경기장 밖에서는 찌푸리는 표정 없이 내내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체력 보충을 위해 경기 때마다 엄마표 주먹밥, 바나나, 에너지겔 등을 먹는 모습이 SNS를 통해 전파되면서 수많은 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도쿄올림픽 때 ‘삐약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국민 동생’이 된 그는 이번 대회에서 거침없는 스매싱을 보여주면서 혼합복식과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 탁구에서 올림픽 멀티 메달이 나온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김택수(남자 단식 동메달·남자 복식 동메달), 현정화(여자 단식 동메달·여자 복식 동메달) 이후 32년 만이다. 그저 귀엽기만 한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실력으로 입증해 냈다. 올림픽 메달은 5세 때 ‘탁구 신동’으로 예능 방송에 출연한 이후 서서히 쌓아온 신유빈의 서사를 완성해 주는 것이었다. 손목 피로 골절 등 성장통이 있어 더욱 그렇다. 물론 여기서 만족할 신유빈이 아니다. 신유빈은 “다음(LA올림픽)에는 더 멋진 (메달) 색깔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올림픽 때 더 오르겠다는 의욕 생겨”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김제덕은 3년 전 도쿄올림픽(단체전·혼성 단체전 금메달) 때보다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단체전 금메달을 딴 후 개인전 8강에서 탈락했는데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도쿄 때는 32강전에서 탈락해 눈물을 보였던 그였다.
김제덕은 “32강전이 고비였는데 잘 넘겨서 8강까지 와서 만족한다”면서 “다음 LA올림픽에도 출전해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잘하지 못했던 부분을 하나씩 해나갔으면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번 대회 김우진처럼 치열한 국내 양궁 대표 선발전을 뚫고 3연속 올림픽 출전에 대한 포부를 밝힌 셈이다.
이 밖에도 수영에서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메달(자유형 400m 동)을 따낸 김우민(22)이나 펜싱 남자 사브르 세대교체의 중심에 있는 도경동(24) 또한 특유의 패기를 앞세워 당당히 시상대에 섰다. 한국 수영에 박태환 이후 12년 만에 올림픽 메달을 안긴 김우민은 “하루에 한 번씩 메달을 걸어봤다”면서 “다음 올림픽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해 뛰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LA올림픽 때는 은메달, 금메달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헝가리와의 결승전 때 피스트에 올라 5연속 득점을 따내면서 승기를 가져온 도경동은 ‘뉴 어펜져스’로 다음 올림픽에서 2연패를 노리게 된다.
파리올림픽 3관왕으로 한국 선수 올림픽 최다 금메달리스트(5개)가 된 김우진은 말했다. “메달 땄다고 젖어있지 말아라. 해 뜨면 마른다”고.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현재에 충실하며 더 나아가라는 뜻이다. 그래도 과거가 미래를 향한 자양분이 될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파리올림픽은 LA올림픽을 위한 전초전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큰 도약을 향한. 더 큰 성취감에 젖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