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복지부동 심각한 수준” 인식에 ‘통치코드 공유’ 공격수 전면 배치
‘발탁’보다는 ‘유임’에 방점…“운동장 좁게 써” vs “국정과제 완수해 반전”
인사(人事)는 메시지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한다. 인사는 국정철학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국정 운영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내각을 지탱하는 이들은 각기 흩어져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인다. 대통령의 인사는 그 인사에 담긴 메시지와 함께 하나로 꿰어서 보면 고도의 기획과 전략, 노림수 즉 ‘전체 그림’이 보인다. 어떤 화살(정치적 수단)로 어느 과녁(정치적 목표)을 겨냥하고 있는지가 보이는 것이다.
“총선과 전대 후에도 ‘尹의 사람’들이 남았다”
지금 여권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정국 돌파와 국면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카드가 역시 인사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지난 총선이 거야(巨野)의 승리로 끝나자 정치권의 관심사는 인사에 쏠렸다. 기록적 참패를 당하며 위기에 내몰린 윤 대통령이 ‘빠르고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총선 후 100여 일, 이 예상은 빗나간 모습이다.
우선 개각 점이 상당히 늦었다. 더 주목되는 점은 개각의 폭이다. 야권의 ‘탄핵 타깃’이 됐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등은 올 하반기에도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반면 ‘협치 내각’을 구성할 것이라는 예상은 엇나갔다. 오히려 더 센 인물이 대거 등장했다. ‘극우’ 논란에 휩싸였던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위원장과 이진숙 전 대전 MBC 사장이 각각 신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와 방송통신위원장이 됐다.
‘레임덕 위기’ 속 윤 대통령이 택한 사람들, 이 ‘반전 인사’에 담긴 속내는 무엇일까.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윤 대통령이 총선 이후 단행한 이번 인사에서 읽어야 할 윤심(尹心·윤 대통령의 의중)의 숨은 코드는 3가지다. 바로 ①중심을 지키고(최측근 이상민 장관 유임) ②집토끼를 잡고(김문수 후보자 배치로 강성 지지층 결집) ③반전을 노리는(이주호 장관 등에게 국정과제 완수 당부) 것이다.
크고 작은 선거 후에는 늘 인사가 따른다. 승자는 측근을 요직에 배치할 힘과 명분을 거머쥔다. 반면 패자는 다르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선발 명단을 대폭 교체하곤 한다. 정치의 오랜 불문율이다. 이에 총선 후 정가에선 윤 대통령이 협치의 물꼬를 트기 위해 ‘야권의 앙숙’들을 대거 교체하고, 그 자리에 야권 출신 혹은 중도 성향 인사를 앉힐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입법권력의 도움 없이 행정권력만으로 대선 공약을 이행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통상의 관례가 윤석열 정부에선 적용되지 않는 모습이다. 총선 대패로 입법권력이 거야로 넘어갔지만, 윤 대통령은 ‘대규모 개각’ 카드를 빼들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관섭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친윤(親윤석열)계 복심 정진석 비서실장으로 교체했을 뿐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핵심 참모 대부분을 유임시켰다. 이태원 참사 이후 야당이 탄핵을 시도했던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비롯해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등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윤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함께한 3년 차 장관들이다.
이를 두고 여권 내부에서도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국민의힘 지도부 핵심 관계자는 “정권 2년 차까지는 ‘대통령의 시간’이다. 인사 자율권이 극대화되는 시기”라며 “그러나 총선으로 그 시간에 제동이 걸렸다. 이제 ‘대통령의 눈높이’가 아닌 ‘국민 눈높이’가 인사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이런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예상과 다르게 인사가 더딘 배경에는 무엇이 자리할까. 현실적으로 당장 역대급 여소야대라는 벽이 존재한다. 여권 입장에선 야당의 동의가 필요한 총리 인준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의 본심은 무엇일까. 윤 대통령은 무엇을 우려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취재에 따르면 윤 대통령과 측근들도 ‘레임덕 위기’라는 공통된 우려와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출한 해법이 일각에서 제기됐던 ‘빠른 인사, 파격 인사’로 귀결되지 않았다. 이런 결론이 나온 배경으로는 ①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 조짐 ②좁은 인재풀(pool) ③강성 보수 지지층 결집 등이 언급된다.
취재에 따르면, 지금 용산 대통령실은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을 우려하고 있다. 공직의 복지부동은 레임덕의 대표 증상이다. 총선 후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힘이 일부 빠지자 이른바 ‘늘공’(‘늘 공무원’이라고 부르는 직업 관료)들이 소극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복지부동’ 분위기가 만연했다는 위기감이 대통령실에 감돌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좋아, 빠르게 가!’로 대표되는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이 각 부처 현장에선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인지한 윤 대통령이 관료형 장관이나 온건·중도 성향 참모의 기용을 꺼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여권 내에서 많이 제기된다. 자신의 성향을 잘 파악하는 ‘최측근 참모’ 혹은 위험을 감수하는 ‘투사형 장관’을 앞세워 공무원 사회의 공직 기강을 확립하려 한다는 시각이다.
불안한 尹, ‘측근’ 남기고 ‘투사’ 적극 기용
대통령실 사정에 정통한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개혁 의지와 속도를 각 부처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한 상황”이라며 “이런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좀 더 빠르고, 세게 개혁을 추진할 공격력 있는 장관들이 필요하다”고 이번 대통령 인사의 숨은 배경을 전했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빠르게 교체하지 않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 장관은 윤 대통령의 ‘충암고·서울대 법대’ 4년 후배로, 사석에선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졌다. 이에 내각에선 이 장관이 ‘실세 장관’으로 통한다. 이 장관은 탄핵 위기에서 벗어나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국정의 중추 부처인 행안부에 대한 ‘그립감’이 더 세진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등 ‘외치’에 집중하고 있는 윤 대통령으로선 개혁 의제를 과감하게 실행해갈 인물이 필요한데, 이 ‘내치’의 적임자를 이 장관으로 보고 있다는 후문도 들린다.
‘극우 논란’을 무릅쓰고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것도 결국은 그의 ‘개혁의지’ ‘대야·대노조 공격력’을 높이 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 김 후보자는 2022년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강경 대응을 법치주의 확립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을 둘러싼 노사 갈등, 노동조합의 ‘하투(여름 투쟁)’ 등 난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타협에 능한 ‘수비수’나 방어에 익숙한 ‘골키퍼’를 뽑는 대신 더 과감히 맞설 ‘공격수 김문수’를 택한 셈이다.
한편에선 업무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윤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개각 지연’의 한 이유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표적으로 윤 대통령은 ‘의료 개혁’을 자신의 임기 내에 완수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세웠다고 한다. 의료 개혁을 지휘하고 있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이에 맞물린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임기 내 개혁의 ‘마침표’를 찍어 달라는 게 윤 대통령의 최근 지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 논란에도 ‘지지율 방어선’ 구축 노려
일각에서는 인재풀이 좁아졌을 가능성도 언급한다. 윤 대통령이 ‘탕평 인사’에 나서고 싶어도 마땅한 후보군이 없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여소야대 지형으로 ‘청문회 문턱’이 높아진 가운데, 입각이 정치적으로 ‘큰 메리트’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7월31일 JTBC 《오대영 라이브》에 출연해 “대통령이 ‘흘러간 분들’을 쓰기 시작했다. 인재풀을 좁게 쓰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제안을 해도) 거절을 많이 당하셨을 것”이라며 “장관이 소신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고, 인사청문회도 야당이 초강세인 상황 속에 (제안)받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윤 대통령이 레임덕 위기에 몰리자 마지노선 지지율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적 보수 지지층’ 결집을 도모하려 한다는 시각도 있다. 야당이 공공연히 ‘탄핵’ 가능성까지 언급하기 시작한 가운데, 정권을 수호할 ‘집토끼 당심’을 찾아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선결 과제가 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최근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4월 총선 이후 점진적 상승세를 그리고 있지만, 보수 텃밭인 대구·경북(TK) 지역의 지지율이 예상보다 낮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국갤럽이 7월23~25일 3일간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윤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를 조사한 결과, 긍정 답변이 TK에서 전주 대비 9%포인트 하락한 38%를 기록했다. 친윤 지지세가 강한 70대 이상 지지율도 전주 대비 6%포인트 내린 58%로 나타났다.
이준한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인사를 보면 ‘국정운영 방향 전환’ 필요성에 윤 대통령이 실제 공감하는지 의문”이라며 “또 야권에서 탄핵까지 거론하는 상황에서 이 정권의 위기를 같이 헤쳐가고자 하는 사람도 몇 없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재를 기용할 객관적인 환경이 안 된다면 야당과 같이 내각 구성을 협의하며 협치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삼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기사에서 인용한 한국갤럽 조사는 이동통신 3사 제공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 추출해 전화조사원 인터뷰(CATI) 방식으로 이뤄졌다. 총 통화 8356명 중 1001명이 응답을 완료해 응답률은 12.0%,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