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 뿌리 깊은 미국·서방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 커
푸틴, 국내 정치에 교묘히 활용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당초 수도 키이우를 점령해 우크라이나를 신속하게 평정하려 했던 푸틴 대통령의 계획은 많이 어긋나버렸다. 2단계 작전으로 수도 진공 계획을 철회하고 우크라이나 동남부에 러시아 전력을 투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마리우폴은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쟁터가 되었다. 민간인 거주지에 대한 무자비한 포격과 공중타격으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키이우 인근 도시 부차에서 드러난 민간인 학살 참상은 미국과 서방뿐 아니라 전 세계에 푸틴에 대한 공포감을 각인시켰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푸틴을 전범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가 위기 상황 따라 지지율 하이킥 나타나
이렇듯 푸틴을 규탄하는 국제여론이 들끓고,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 시위가 이어지면서 일각에서는 푸틴의 실각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러시아 내부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다. 3월31일(현지시간)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는 푸틴의 지지율이 83%로 수직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설이 나돌던 몇 달 전에 보여준 지지율 63%에서 20%포인트나 상승한 수치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60%대 지지율도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지만, 러시아의 특성과 지난 푸틴 집권기를 통틀어 비교해 보면 이 지지율은 낮은 수준이다. 어쩌면 푸틴이 낮은 지지율에 위기감을 느껴 이를 돌파하려고 전쟁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과거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수직으로 상승했던 몇몇 예를 보면 더욱 그렇다. 대통령 3연임 금지 조항으로 인해 총리로 잠시 물러나 있던 푸틴의 지지율이 2008년 발생한 조지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88%까지 치솟았다. 그 기세로 재선이 가능토록 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 재도전에서도 승리했다. 2014년에도 크림반도 병합 직후 60%대의 푸틴 지지율이 80%대로 급상승한 적이 있다. 특히 2014년 이후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전방위적인 대러 경제제재 조치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매우 어려웠음에도 푸틴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지지는 지속되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가 내세운 전쟁의 명분이 우크라이나 탈군사화와 탈나치화였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명분보다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다. 푸틴은 “지난 기간 동안 나토가 동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다섯 번이나 러시아를 속였다”고 강조하면서 서구에 대한 배신감과 적의를 드러냈다.
사실 러시아는 1990년대와 푸틴 집권 초기만 해도 나토 가입 의사를 밝혔으며, 나토의 동진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옛 소련 국가들에서 발생한 색깔 혁명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조지아·키르기스스탄에 친미 정권이 수립되고, 이어 우즈베키스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친미 정권 수립을 위해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면서 러시아는 미국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나토의 동진과 더불어 동유럽에 러시아를 겨냥한 공격용 무기를 배치하려 한다는 러시아의 의구심이 나토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다. 이런 배경이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러시아인의 푸틴에 대한 높은 지지로 나타나고 있는 셈인데, 거기엔 다음의 네 가지 이유가 있다.
푸틴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심경
첫째로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대신에 자국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선택했다. 러시아인들은 평소에 친근한 이웃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우크라이나와 유혈 낭자한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전쟁 초기 복잡한 심경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전쟁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의사가 반으로 나뉘었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참전의 공포로 인해 70%가 반대했으나, 50대 이상에서는 70%가 찬성해 신구 세대의 견해가 갈렸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확전으로 발전하는 기색이 보이자 푸틴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둘째로 미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분노다.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해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대리인이 되어 전쟁에서 희생당하고 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는 러시아 정부의 프로파간다와 언론 통제로 인해 제한된 정보를 듣고 볼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지만, 지난 시기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나친 공격적 행위에 적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지금의 일극 체제와 미국의 일방주의에 도전할 의사도 그러할 능력도 없었다. 미국을 상대로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기에는 러시아 내에 어려움이 너무 산적해 있었다.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에 대한 노력에도 자원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러시아를 미국이 지속적으로 포위 공격하고 파괴하려 한다고 러시아인들은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러시아의 침공 여부를 떠나 그 원인을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찾고 있다.
셋째, 미국과 서구에 대한 두려움이다. 러시아인들은 1991년 소련의 붕괴가 미국과 서구의 전방위적인 공격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특히 기성세대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몸으로 체험했던 1990년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지난 10년간 나토의 포위와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끊임없는 적대적 행위에 대해 두려움을 넘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은 러시아 역사상 발생했던 커다란 전쟁에서 많은 물자와 인명 피해를 보았던 것에서 기인한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폴레옹의 침공과 독일의 침공, 그리고 소련의 붕괴다.
푸틴 개인에 대한 기대감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인들은 푸틴 정권이 권위주의 정권이며 그가 장기집권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매년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공감의 정치를 시도한다. 이런 과정에서 대다수 국민은 푸틴을 잘 알고 있다고 느낀다. 푸틴이 추구하는 강한 러시아 슬로건은 러시아 국민에게 대리 만족을 안겨주었다. 그런 러시아인에게 바이든 대통령의 “전범” 비난은 오히려 반미 감정만 더욱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러시아인들은 미국과 서방에 대해 동경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외부로부터 위협을 느낄 때 러시아인들은 국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푸틴이 잘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