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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홍수 속에서 《싱어게인》이 부각되는 이유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 의미 있는 질문 던져

10, 11, 17, 20, 23, 26, 29, 30, 32, 33, 37, 47, 55, 59, 63. 이것은 ‘못다 핀 꽃 송이들’의 이야기다. 설 수 있는 무대와 나아갈 길을 잃었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모였다. 단 한 장이라도 앨범을 낸 적이 있다면 도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한 번의 기회가 더 필요했던 절실한 이들이 노래할 수 있는 무대. ‘무명가수전’이라는 부제를 단 이 프로그램의 무대에 이름 대신 1부터 71까지의 숫자를 단 참가자들이 다시 섰고, 이제 열다섯이 남아 노래한다. JTBC 《싱어게인》이다. 1월11일 방송된 이 프로그램의 8회 시청률은 전국 기준 8.45%, 수도권 기준 9.5%를 찍었다. 쟁쟁한 월요 예능 터줏대감들을 제치고 시청률 10%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싱어게인》은 지금까지의 오디션 프로그램과는 다른 여러 가지 구성요건을 보여준다. 유명한 노래를 부른,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의 무대는 ‘익숙한 새로움’을 선사했고, 참가자들의 조합으로 다툼 한 번 없이 만들어진 하모니는 ‘레전드 무대’를 만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경연 프로그램의 자극적인 부분에 지친 시청자들을 포용하는 효과를 냈다. 매회 등장하는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노래는 폭넓은 연령층을 시청자로 포섭했다. 일명 ‘순한 맛’. 《싱어게인》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많은 사람의 선호를 파고드는 이 순한 맛의 프로그램에는 없는 것이 많다. 참가자들의 이름이 없고, 정해진 장르가 없고, 불화와 다툼이 없고, ‘악마의 편집’이 없다. 이 여러 가지의 ‘부재’는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싱어게인》을 보고 듣게 했는가. 난무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 속에서 《싱어게인》의 무대가 가장 뜨거웠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싱어게인》에는 정해진 장르가 없기에 다양한 포지션의 실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하모니는 또 하나의 '레전드 무대'를 만들어냈다. ⓒjtbc
《싱어게인》에는 정해진 장르가 없기에 다양한 포지션의 실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하모니는 또 하나의 '레전드 무대'를 만들어냈다. ⓒjtbc

이름과 장르를 지운 결과

우선 이름이 없다. 《싱어게인》이 다른 오디션과 차별화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가수들을 ‘찐 무명’ ‘슈가맨’ ‘오디션 최강자’ ‘OST’ ‘재야의 고수’ ‘홀로서기’ 등으로 조를 분류해 그들의 과거를 짐작하게 하고, “나는 ○○ 가수다”라는 한 줄의 설명을 추가해 그들의 최소한의 정보만을 알렸을 뿐이다. 가수들을 나타내는 것은 ‘번호’뿐이다. 가수들은 1호부터 71호까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며 무대에 오른다. 제작진이 이름 대신 번호를 선택한 건 가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혹은 옅게 남아 있을지 모를 인지도를 제거하기 위한 장치다. 그렇다면 대중은 이들을 모를까. 그렇지 않다. 익명이기 때문에 가수에 대한 관심도는 더 커진다. 가수의 노래를 듣고, 직접 그를 찾아보고 싶어지면서, 직접 그를 검색해 보면서 이름과 노래는 뇌리에 더욱 각인된다. 그렇게 《싱어게인》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직접 ‘○호’를 찾아보게 만들며 ‘리부팅’이라는 기획 의도를 현실화시킨다. 실제로 방송 이후에는 ‘싱어게인 ○호’가 실시간 검색어 창을 장악한다. 무명 가수들을 유명하게 만들 방법을 고민했던 기획자, 윤현준 CP의 ‘한 수’가 통한 셈이다.
《싱어게인》의 참가자들은 ‘나는 OO 가수다’라는 한 줄로 자신을 알린다
《싱어게인》의 참가자들은 ‘나는 OO 가수다’라는 한 줄로 자신을 알린다. ⓒjtbc
정해진 장르도 없다. 아이돌 음악은 이미 대중음악계의 주류이고, 트로트가 새로운 주류의 반열에 올라선 지금. 대부분의 음악 프로그램은 아이돌 음악과 트로트로 점철돼 있다. 더군다나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 특성상 하나의 장르를 꼽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랩과 힙합을 선택하든, 아이돌을 선택하든, 트로트를 선택하든, 한 프로그램이 선택하는 장르는 보통 하나다. 《싱어게인》은 여기서 승부수를 띄운다. 실력 있는 가수들을 무대에 세우되, 장르는 제한하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그램 초반에 필히 들어야 하는 미숙한 참가자들의 노래, 같은 장르의 나열로 피로감을 주지 않는다. OST 가수, 뮤지컬 실력자, 아이돌, 로커, 밴드 보컬 등 이미 실력을 갖춘 다양한 포지션의 가수들이 등장하는 《싱어게인》은 분명 오디션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그들의 음악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데 더 집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을 ‘오디션에 안 어울리는 가수’라고 표현했던 70호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서정적 음악을 들려줬고, 63호는 이문세의 《휘파람》을 부르면서 발라드 정공법으로 승부했으며, 33호는 심수봉의 《비나리》를 통해 애절함을 담아냈다. 관록 있는 심사위원들에게도 ‘낯선 음악’이 오디션장에서 등장하는 진풍경도 등장했다. 30호는 이효리의 《치티 치티 뱅뱅》을 ‘족보가 없는 음악’으로 선보이면서 누구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장르로 재탄생시켰다.
《싱어게인》의 심사위원들. 시니어와 주니어로 구성돼 있다. ⓒJTBC
《싱어게인》의 심사위원들. 시니어와 주니어로 구성돼 있다. ⓒJTBC

불화와 경쟁 강조하는 과도한 편집 없어

극한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에,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종종 등장하는 부정적인 장면도 없다. 짧은 연습시간 속에서 합동 경연을 준비하면서 나타나는 참가자들의 불화는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졌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서로 ‘센터’를 차지하기 위한 심리적 상태를 부각시키며 특정 참가자를 욕심 많은 모습으로 그려냈고, 불화 속에서 진행된 무대를 성공시키는 모습으로 극적인 반전을 꾀하는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싱어게인》은 이런 갈등의 서사를 과감하게 삭제했다. 스승과 제자가 만나 ‘뜻밖의 재수강’을 하게 되며 ‘세월의 벽’에 웃음을 터뜨리고, 함께 무대를 하던 참가자와 다음 무대에서 라이벌로 맞닥뜨리는 상황에서도 서로의 무대를 즐기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한다. 이것은 과도하거나 자극적인 편집이 없다는 《싱어게인》의 장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참가자들의 행동을 교묘하게 편집해 긴장감을 유도하거나, 인물들 사이의 대립각을 세우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몰입감을 높이는 ‘악마의 편집’은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도 방송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책임지는 ‘치트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과 발표를 앞두고 시간을 질질 끄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특성, 화제를 모으기 위해 출연자의 실수를 먹잇감으로 삼아 무한 반복으로 보여주는 편집을 여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갈등을 전시하고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보다 그들의 음악과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통한다는 걸, 《싱어게인》은 시청률을 통해 직접 증명한다. 특유의 억지스러운 장치에서 벗어난 이 방송이 지난했던 음악 예능의 단비 같은 존재로 떠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한 장르를 끌어안기 위해 심사위원 구성의 연령대도 넓혔다. 심사위원을 시니어와 주니어로 나눈 것 역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첫 시도였다. 기존의 오디션처럼 신인을 발굴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음정이나 박자 같은 기본을 논할 필요는 없다. 심사 기준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다. 그래서 현역에서 인정받는 주니어의 관점도 필요했다. 작사가, 프로듀서, 보컬, 래퍼 등 다양한 장르에서 ‘열일’하는 아티스트들이 모였다. 저마다의 시선을 통해 느끼는 솔직한 평으로, 전혀 다른 의견들을 내놓는다. 전문적인 조언을 내놓는 시니어 심사위원도 있고, 마치 시청자처럼 무대에 대한 진한 감상만을 내보이는 주니어 심사위원도 있다. 단순히 ‘평가’하는 윗사람들이 아니다. 심사위원 역시 시청자와 함께 음악을 ‘감상’하는 청자임을 감추지 않는다. 심사위원들끼리도 다름을 인정해 가면서 프로그램의 폭은 넓어진다.
헤비메탈 가수인 29호는 TOP10 결정전 무대를 통해 '음악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jtbc
헤비메탈 가수인 29호는 TOP10 결정전 무대를 통해 '음악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jtbc
《싱어게인》이 담은 다양성의 가치는 그동안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던 47호 가수를 ‘올 어게인’의 반열에 올려놓으면서 그가 계속 노래하고 싶게 만들었고, 그동안 오디션뿐 아니라 브라운관을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비주류 영역인 헤비메탈을 ‘음악의 정수’로 여겨지게 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이 경연 무대들은 시청자들의 다양한 청각과 시각 취향을 존중하면서 정해진 유행에 편승하기 일색이었던 음악 예능 프로그램들에 질타를 던진다. 29호 가수처럼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다채롭게 피우기 위해 가수들은 ‘다시’ 노래한다. 《싱어게인》의 무대에서 이 꽃들은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이제 이름을 내걸고 노래할 수 있게 되는, TOP 10을 가리는 여정 속에 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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