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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규제 이후에도 한국 콘텐츠 리메이크 활발...“정치와 문화는 별개”

도쿄에서 영양사로 일하는 A씨는 올여름 한국판과 일본판 《보이스》를 함께 봤다. 2017년 처음 일본 케이블TV에서 공개된 《보이스》 시즌1이 8월 한 달 동안 재방송되었고, 같은 시기 매주 토요일 10시에 지상파 채널 니혼TV에서 리메이크판이 방송됐다. 16부작이었던 원작을 10부에 담아낸 리메이크판은 중요한 장면들로만 구성해서인지 다소 조잡했다. 다만 그만큼 상상력을 자극해 재미있었다는 것이 A씨의 감상 소감이다. ‘이 장면에서 앵글이 이렇게 다르구나’하고 비교해 보는 것도 A씨에게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회사원 B씨는 한국영화 팬으로 ‘깊은 감정선’ 때문에 처음 한국영화에 매료되었다. 그는 특유의 ‘강렬함’이 한국영화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리메이크된 영화들이 이 두 가지를 잘 살리지 못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일본 사정에 맞게 각색해 보는 것도 일본 영화를 풍부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10월22일 일본 도쿄 신주쿠 한인타운을 찾은 일본 시민 및 관광객들이 다양한 한류 상품을 살펴보고 있다. ⓒ 뉴스1
10월22일 일본 도쿄 신주쿠 한인타운을 찾은 일본 시민 및 관광객들이 다양한 한류 상품을 살펴보고 있다. ⓒ 뉴스1

일본에 부는 한국 콘텐츠 '리메이크 열풍'

한·일 관계는 차갑게 식었지만, 일본 내 한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볼 수 있는 한국 드라마는 간토 지역 지상파 방송을 기준으로 20개가 넘는다. 위성방송과 케이블방송까지 포함하면 일주일 내내 한국 드라마를 접할 수 있을 정도다. 장르도 다양하다. 《대군-사랑을 그리다》(TV조선, 2018년)나 《해신》(KBS2, 2004년)과 같은 사극은 물론 《위대한 조강지처》(MBC, 2015년) 같은 일일드라마,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KBS2, 2015년)를 포함한 아침드라마까지 다양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일본 텔레비전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게 된 것은 꽤나 시간이 흘렀다. 《겨울연가》(KBS2, 2002년)가 2003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한류’라는 한국 대중문화 유행 현상이 일어났고 한국 드라마, 영화, 가요 그리고 배우와 가수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후 꾸준히 한국 작품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일본 시청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움직임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국 드라마, 영화 등의 ‘리메이크’ 붐이다. 2007년에는 《호텔리어》(MBC, 2001년)를 리메이크한 작품이 방송되었고, 한국영화를 단편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작품들이 방송되기도 했다. 《미남이시네요》(SBS, 2009년)의 경우 원작이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을 계기로 2011년 리메이크 후 방송되었다. 올여름에는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 3개가 동시에 방송되기도 했다. 《보이스》(OCN, 2017년), 《TWO WEEKS》(MBC, 2013년) 그리고 《싸인》(SBS, 2011년)이 그 주인공이다. 이 세 드라마는 각각 니혼TV, 후지TV 계열, TV아사히 계열에서 7월부터 9월까지 방송됐다. 시청률 조사 회사 비디오리서치에 따르면 간토 지역 기준으로 평균시청률도 각각 10.9%, 6.5%, 10.9%를 기록했다. 서번트 신드롬을 가진 소아외과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 《굿닥터》(KBS2, 2013년)는 미국에 이어 일본에서도 리메이크되었고, 2018년 전체 드라마 시청률 순위에서 8위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도 꾸준히 리메이크되고 있다. 강동원·고수 주연의 《초능력자》(2010년)를 리메이크한 《MONSTERZ》가 2014년, 심은경 주연의 《수상한 그녀》의 리메이크판은 2016년에 공개됐다. 《내가 살인범이다》(2012년)와 《써니》(2011년)도 리메이크돼 각각 2017년과 2018년 일본 관객들과 만났다. 2019년에는 김하늘 주연의 《블라인드》가 《보이지 않는 목격자》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돼 현재도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만의 기획력과 독특한 시나리오가 세계 콘텐츠 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한류 팬들에게는 원작과 비교하며 보는 재미를 선사하고, 한류와 무관한 시청자들에게는 새로운 스토리로 참신하게 다가간다. 드라마와 영화 외에 한국 버라이어티 방송도 일본에서 큰 인기다. 한국에서 여러 논란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듀스 101》은 일본판이 9월말부터 방송되고 있다. CJ ENM과 일본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요시모토 흥업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첫 회와 마지막 회는 지상파 방송 TBS 계열에서 방송한다. 촬영 일부는 한국에서 진행되었고 투표 방식, 유튜브를 통한 무대 공개와 홍보 또한 한국 방송 포맷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타이틀곡도 한국 작곡가가 맡았다. 한국 아이돌 ASTRO의 팬인 대학생 C씨. 예전에는 일본 아이돌의 팬이었지만 멤버들의 멋진 외모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춤 실력과 뮤직비디오에 끌려 이제 한국 아이돌에 눈을 돌리게 됐다. 한국판 《프로듀스 101》도 챙겨봤고 ‘원픽’도 있었다. 실력 있는 참가자들이 많고,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이 한국 ‘프듀’의 매력이었다. 데뷔할 멤버를 투표로 직접 정한다는 설정도 일본에선 볼 수 없어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9월부터 보고 있는 일본판 ‘프듀’의 매력은 참가자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직접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한다.  

7월 수출규제 이후에도 한류 콘텐츠 인기 여전

이렇듯 리메이크 드라마 세 편이 방영되고, 리메이크 영화가 개봉한 것은 모두 7월 이후의 일이다. 일본 아베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한 7월1일 이후다. 정치에서의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지만 일본 내 한류 콘텐츠는 여전히 인기다. 대학생 C씨도 정치 문제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영화 팬 B씨도 정치와 문화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올드보이》를 스크린에서 다시 한번 보기 위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고 7월 이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공작》 《협상》 《독전》 등도 모두 챙겨봤다. 9월28, 29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문화교류 이벤트 ‘한일축제한마당 2019 in Tokyo’가 열렸다. 주일한국문화원에 따르면 이틀 동안 7만2000명 정도가 행사장을 방문했고 한국 드라마, 영화, 음악 팬들이 대다수였다. 행사장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정치와 관계없이 문화적 교류를 하고 싶어서, 관계가 악화된 때야말로 교류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참여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오랜 기간 한류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동방신기도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일본 5개 도시에서 투어 콘서트를 개최한다. 젊은 세대에 인기가 많은 세븐틴도 10월과 11월에 걸쳐 4개 도시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계적 인기의 방탄소년단(BTS)도 11월과 12월 오사카와 지바(千葉)에서 대규모 팬미팅을 개최해 일본팬들과 만난다. 정치적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 아티스트들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초기의 한류가 특정 배우에 대한 팬덤에서 시작됐다면 현재는 콘텐츠 자체가 가지는 힘이 한류를 이끌고 있다. 한국 콘텐츠는 대체 불가한 것이 되었다. 한국의 드라마, 영화, 버라이어티 방송은 ‘참신함’으로 인기를 얻었고, 일본뿐만 아니라 소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 콘텐츠 시장의 좋은 상품이 되고 있다. 한국 콘텐츠만이 가진 기발한 발상과 한발 앞선 기획력, 뛰어난 실력까지. 이러한 매력이 정치적 냉각기에도 문화교류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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