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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인의 사건추적] 1998년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 사건

지난 1998년 6월10일, 프랑스에서 제16회 월드컵 경기가 개막됐다. 전 국민의 이목은 월드컵이 열리는 리옹에 쏠려 있었다. 6월14일 자정을 넘겨 조별 리그 첫 경기인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펼쳐졌다. 한국이 선취골을 넣으며 앞서갔지만 내리 3골을 내줘 뼈아픈 3대1 역전패를 당했다. 방송 3사가 공동 중계한 이 경기는 시청률 79.2%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역대 TV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날 서울에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축구 경기를 보러 일찍 귀가를 서두른 탓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택시기사 송아무개씨는 손님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새벽 2시쯤, 강남구 신사동 사바이 단란주점 앞을 지날 때 피를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송씨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112에 신고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이 여성의 벗겨진 아랫도리를 가리고 급히 영동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했다. 얼마 후 강남경찰서 형사대와 감식반 요원들이 차례로 사건 현장인 단란주점에 도착했다. 형사들은 단란주점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경찰은 주점 안 전기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 일러스트 오상민
ⓒ 일러스트 오상민

세 명 살해된 참혹한 범행 현장

그 순간 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출입문과 카운터 쪽 벽에는 줄처럼 길게 피가 묻어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이 넘쳐 바닥이 흥건했다. 경찰은 1번 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참혹한 모습이 목격됐다. 노래방 기기 앞에는 남녀 세 구의 시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피해자들의 신원도 파악됐다. 단란주점 밖에서 구조된 여성은 손님인 박아무개씨(여·41)였다. 숨진 여성 중 한 명은 단란주점 주인인 정아무개씨(여·41)로 확인됐다. 발견 당시 정씨의 시신은 양손이 뒤로 꺾인 채 케이블타이로 결박돼 있었다. 바지와 팬티는 칼로 찢겨져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정씨의 머리에는 심한 타박상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는 깊이 8cm, 등에는 깊이 17cm의 자창이 있었다. 특히 경악스러운 것은 정씨의 오른쪽 입이 귀 쪽으로 13cm나 찢겨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 명의 여성은 박씨의 친구인 유아무개씨(여·41)였다. 유씨의 시신도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범인들은 유씨의 상의를 완전히 벗기고 바지와 팬티를 칼로 찢어내고 엉덩이를 노출시켰다. 유씨도 얼굴과 머리를 집중 구타당해 얼굴 전체가 붉게 변색된 상태였다. 이마는 범인에게 강하게 짓밟힌 듯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범인들은 유씨의 목을 칼로 그어 반쯤 잘라놓을 정도로 잔인했다. 나머지 한 명은 택시기사인 박아무개씨(남·38)였다. 박씨는 동창생의 소개로 주인 정씨를 알게 된 후 주점에 자주 들렀던 단골손님이다. 박씨의 양팔도 뒤로 꺾인 채 손목이 철사로 꽁꽁 묶여 있었다. 박씨 또한 머리 부분을 집중 구타당했다. 그의 몸에는 17곳이나 칼로 찔리고 베인 흔적이 있었다. 이 중 가슴은 17cm, 등은 9cm나 될 정도로 깊이 찔렸다. 경찰은 범인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현장에 대한 정밀감식을 벌였다. 경찰은 주점 계산대 바닥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면장갑 한 켤레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피 묻은 여성용 청바지와 팬티가 버려져 있었다. 또 범인이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골무 한 개도 수거했다. 이 밖에 다수의 지문과 담배꽁초, 운동화 족적 3개도 찾아냈다. 경찰은 이 중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단서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범인들과 연관성 있는 것은 족적뿐이었다. 골무에서도 지문이나 혈흔이 검출되지 않아 범인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던 단순 소지품으로 결론 내렸다. 결과적으로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증거물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가장 잔인한 미제사건으로 남아

도대체 그날 단란주점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찰은 생존자 박씨를 통해 사건 당시의 전후 사정을 알아봤다. 사건 당일 단란주점에는 총 7명이 있었다. 주인 정씨 외에 손님은 6명이었다. 인근 식당 종업원인 박씨는 음식점을 경영하는 친구 유씨를 만나 저녁을 먹은 후 사바이 단란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택시기사 박씨는 멕시코전을 보려고 잠깐 주점에 들렀다. 친구 사이인 박씨와 유씨는 ‘1번 방’으로 들어가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시간을 보냈다. 택시기사 박씨는 홀에서 주인 정씨와 대화하며 TV를 시청했다. 이때 ‘2번 방’에서는 남성 3명이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주점 안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주인 정씨의 제안에 따라 박씨와 유씨는 2번 방의 남성들과 합석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들 중 한 명이 몸을 밀착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원래 있던 1번 방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화장실에 다녀오던 박씨는 계산대에서 주인 정씨와 남성 3명이 승강이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박씨는 별일 아닌 듯 다시 1번 방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때부터 잔혹한 살인극이 시작된다. 1번 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피범벅이 된 주인 정씨와 택시기사 박씨가 발길에 차이면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양손은 뒤로 결박된 상태였다. 뒤이어 남성 3명이 들어와 두 사람을 마구 폭행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박씨와 유씨는 기겁하고 말았다. 범인들은 박씨와 유씨의 손도 뒤로 결박했다. 방을 나간 범인들은 주점 안을 뒤져 금품을 챙겼다. 다시 1번 방으로 들어온 범인들은 피해자들이 착용하고 있던 팔찌와 목걸이 등을 빼앗았다. 주머니를 뒤진다며 칼로 바지를 찢기도 했다. 범인들은 그냥 나가지 않았다. 피해자들을 주먹과 발로 무차별 구타하거나 구둣발로 바닥에 내려찍듯이 수차례 밟기도 했다. 주인 정씨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말이 많다며 칼로 입을 찢었다. 피해자들은 범인들이 휘두른 흉기에 온몸을 베이고 찔리면서 죽어갔다. 주점 안은 신음소리와 비명소리로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범인들은 살인극을 끝낸 후 피해자들의 머리를 흔들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박씨도 목과 옆구리를 찔렸으나 다행히 급소를 비켜가 살았고, 죽은 척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이어 범인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도면밀했다. 범인들은 지문과 체액 등이 묻어 있을 유리컵과 접시 등을 깨서 바닥에 놓고 잘게 부쉈다. 신문지로는 자신들의 손길이 닿은 집기 등을 닦아냈다. 여기에 더해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흔적을 없애려고 주방의 수도꼭지를 틀어놓았다. 범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유유히 사라졌다. 경찰은 수사본부를 차리고 범인 검거에 나섰다. 정씨의 이혼한 남편 등 피해자들의 주변인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동일 수법 전과자 등을 상대로 사건 당일 행적 등을 조사했지만 모두 용의선상을 벗어났다. 당시 비가 내리는 새벽인 데다 주점이나 인근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주점 안에서 범인들의 지문과 DNA 확보에 실패하면서 수사는 제자리걸음만 계속했다. 그나마 생존자인 박씨의 기억을 더듬어 범인들의 몽타주를 만드는 데 그쳤다. 유일한 희망은 시민들의 제보였다. 경찰은 몽타주를 전국에 배포하며 제보를 기다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상파 공개수배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제보를 받았다. 하지만 범인을 특정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결국 지금까지 가장 잔인한 미제사건 중 하나로 남았다. 더욱이 지난 2013년 6월14일자로 공소시효가 만료돼 범인을 잡아도 처벌이 어렵게 됐다. 범인들은 지금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 유족들과 생존자의 상처와 고통은 여전하다.  

범인이 남긴 단서들

1. 우발적 살인이다

범인들은 6월13일 오후 10시쯤 단란주점에 들어왔다. 이때는 정씨의 동업자인 언니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범인들은 양주 1병과 과일 안주를 주문한 후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11시50분에는 정씨가 가게에 나와 언니와 교대했다. 정씨의 언니는 6월14일 오전 1시30분쯤 전화를 걸어 동생과 통화했다. 이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택시기사 송씨의 112 신고는 오전 2시가 조금 넘어서 접수됐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살인극은 14일 오전 1시30분에서 2시 사이에 벌어졌다. 범인들은 최소 3시간30분 동안 주점에 있었던 셈이다. 강도를 목적으로 들어왔다면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당시는 주점에 손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범행을 위해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범인들은 또 자신들의 지문, DNA 등을 여기저기 묻혀 놓았다. 나중에 흔적을 지우기는 했지만 불필요한 행동이다. 옆방의 여성들과 합석하는 등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여러 명의 목격자까지 있었다. 독한 양주를 3병이나 마신 것도 계획된 범행으로 볼 수 없다.

2. 범인들은 다른 범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범인들은 주점에 들어오기 전부터 흉기와 케이블 타이를 소지하고 있었다. 조직폭력배들도 흉기는 소지해도 결박용 끈까지 갖고 다니지는 않는다. 이것은 범인들의 다른 범행을 위한 사전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주점에서는 우발적 살인을 저질렀지만 이전에 모종의 범행을 모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3. 범인 중에는 우범자가 있다

이 사건은 일반인들이 저지른 사건으로 보기에는 너무 잔혹하다. 범인들이 사용한 칼은 사시미 칼로 불리는 회칼과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칼로 추정됐다. 범인들은 피해자들의 머리를 집중 구타했고, 온몸을 난도질했다. 증거 인멸은 숙달된 조교처럼 주도면밀했다. 이에 따라 범인들 중에는 특수부대에서 전문적인 살인 훈련을 받은 적이 있거나 이전에 비슷한 범행을 저지른 우범자가 끼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범인 중 한 명이 “아줌마, 우리도 회사 잘려서 아줌마랑 같은 처지거든? 우리도 안 이러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범인들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장에 떨어진 ‘골무’는 범인 중 한 명의 직업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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