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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리》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보여준 여성의 일상

“저는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 아이 둘을 키우며 이제 막 셋째까지 출산한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집으로 찾아온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가 건넨 이 한마디에 눈빛이 흔들린다. 보살핌이 필요한 대상은 갓 태어난 아이뿐만이 아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신체적 변화에 더해, 좋은 엄마이자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까지 견뎌야 하는 여성들 역시 보살핌이 필요하다. 《툴리》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영화다. 작품마다 변신의 귀재가 되는 샤를리즈 테론이 20kg 이상 체중을 불려가며 임신부와 산모의 상태를 연기한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과정이 꼭 필요했던 이유가 《툴리》에 담겨 있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여성의 일상을 놀라울 만큼 현실적인 감각으로 목격하게 하는 것. 더불어 그 전쟁 같은 일상에 작은 판타지를 선물한다는 목적이 분명한 작품이다. 

 

《툴리》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현실적 이야기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많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가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작품은 찾기 어렵다. 이것이 실제로 많은 여성의 현실적 일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아한 지점이다. 결혼과 임신을 낭만적 시선으로, 이후 이어지는 출산을 신성한 것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은 더러 있지만 그 이상의 현실 감각을 견지하고 있는 작품은 왜 적을까. 단지 이 과정이 ‘영화적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게 정말 ‘영화적’이 아니란 말인가?

《툴리》는 이 생각에 전면으로 맞선다. 영화의 거의 유일한 사건이라면 마를로의 집으로 툴리가 찾아오는 것 정도다. 해결해야 할 사건이 있고, 그를 위해 기승전결을 좇는 구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의 리듬감은 반복되는 행위 자체에서 생긴다. 젖 먹이기, 우는 아이 달래기, 재우기, 기저귀 갈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육아 루틴을 하나의 리듬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극 중 몇 분을 할애해 이 과정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마를로의 행동반경이라고는 집 안, 둘째 아이의 학교, 친오빠의 집 정도가 전부다. 여기에는 모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가정과 학교 다시 가정으로 이어지는 흐름 안에서 영화는 거창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대신, 일상의 풍경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한 듯한 결과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샤를리즈 테론의 육체는 마를로라는 인물을 하나의 쇼트로, 하나의 풍경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저기 살이 트고 전체적으로 군살이 붙어 형체가 무너지다시피 한 몸. 거동도 불편할 만큼 퍼진 배,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출산 직후 여성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관음의 대상이 아니며 신성한 존재도 아니다. 그저 피로와 물리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육체 그 자체다. 모유를 짜기 위해 가슴에 유축기를 달고 축 늘어져 있는 마를로, 매무새를 정리하기는커녕 흘러내리는 옷가지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낮 시간에 기절하듯 쓰러져 잠드는 마를로의 모습은 이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정확하게 설명한다.

실제로 샤를리즈 테론은 작품마다 자신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변형해 캐릭터를 소화하는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내는 배우 중 한 명이다. 누구보다 화려한 외모를 지녔지만, 작품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인 《몬스터》(2003)에서도, 테론은 체중을 늘리는 동시에 눈썹을 밀고 의치를 끼는 등의 분장으로 캐릭터를 소화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다가, 결국 여섯 명의 남자를 살해한 죄로 복역하다 사형당한 에일린 우르노스라는 인물의 삶은 그렇게 스크린에 생생하게 새겨졌다. 외팔이에 삭발, 온몸에는 기름때를 두른 여전사 퓨리오사를 연기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는 또 어떤가. 테론은 단순히 ‘아름다운 여배우’라는 수식에 갇히는 것을 적극적으로 경계한다.

 

ⓒ 리틀빅픽처스


10대 미혼모부터 산모까지, 진짜 여성의 삶

《툴리》를 연출한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과 각본을 쓴 디아블로 코디는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사이다. 이 콤비는 이미 여러 차례 ‘진짜’ 여성의 삶을 그려왔다. 엘렌 페이지 주연의 《주노》(2008)에서는 10대 미혼모의 이야기를 발랄한 터치로 그렸다. 당시 이 각본으로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디아블로 코디는 전직 스트리퍼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한 차례 화제가 된 바 있다. 스페인어로 악마라는 뜻을 지닌 ‘디아블로’를 가명으로 내세운 범상치 않은 이 작가는, 여성의 삶을 근거리에서 바라본 예민한 시선을 글 안에 녹여내는 재주를 지녔다. 마침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은 《땡큐 포 스모킹》(2005), 《인 디 에어》(2010), 《멘, 우먼 & 칠드런》(2014, 국내 미개봉) 등을 통해 각박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품들에 꾸준히 천착하는 연출가다. 두 사람의 만남은 탁월한 조합인 셈이다.

《주노》에서 주변의 시선에 당당하게 대처하며 자신과 아이의 더 나은 삶을 고민하는 여고생의 모습은, 미혼모를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만 대하려는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를 뒤집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이혼한 채 홀로 육아를 경험 중인 여성을 조명한 《영 어덜트》(2011, 국내 미개봉)도 발군의 작품이다. 감독-작가 콤비가 《툴리》에 앞서 샤를리즈 테론과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들은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열어젖힐 챕터 앞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에 꾸준히 주목해 온 것이다.

《툴리》는 디아블로 코디가 자신의 경험을 녹여 각본을 쓴 작품이기도 하다. 극 중 마를로처럼 셋째를 낳은 뒤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당시 미국 대도시 워킹맘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유행하던 야간 보모 서비스를 신청한 적이 있다. 그때 작가에게 야간 보모의 존재는 거의 구세주와 같았다고. 실컷 유축해 놓은 모유를 테이블에 쏟아버려 망연자실하거나, 요람을 흔들며 이것저것 검색하다 아이 얼굴 위로 스마트폰을 떨어뜨리는 등의 극 중 일화는 출산 직후의 산모들을 인터뷰하며 채워 넣은 생생한 경험담이다.

그렇다면 이 고난의 육아 전쟁기는 어떤 식으로 끝맺는 걸까. 툴리의 등장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며 마를로는 더 좋은 엄마가 된다는 빤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걸까? 그건 아니다. 이 안에는 분명 마를로를 포함한 온 가족의 성장이 담겨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의 현실 감각을 유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툴리》를 향한 거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정작 이 영화를 보고 위로받아야 할 임신부와 산모 혹은 육아 중인 여성들이 극장을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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