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마을서 ‘아메리칸 드림’ 외친 앤디 김 당선…당선 예상됐던 영 김, 막판 아쉬운 역전패
“트럼프 정부의 완전한 비핵화 요구는 비현실적입니다.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의 핵은 인정해 주고 대북제재를 해제해 주는 딜(deal·거래, 협정)이 이뤄져야 합니다.”
미국 의회의 입장이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즘이다. 대전환기를 맞은 한반도의 미래가 미국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연방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브래드 셔먼 의원은 10월18일 LA 한인타운에서 열린 한인 후원행사장에서 이같이 발언했다. 제럴드 코놀리, 디나 티투스 의원 등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대북 협상에서 우선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각각 보냈다. 뉴욕주 하원의 톰 스와지 의원도 남북한 통일과 북·미 간 평화협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한인들에게 약속했다. 정작 한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동안 미 연방 의회는 한인들에겐 넘볼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미국 연방 하원엔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진출해 있다. 중국계, 일본계 등 다른 아시아계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독 한국계 의원이 오래도록 없었다. 미국 내 한인사회에선 정치력 신장을 위해 한국계 의원 배출이 절실하다는 여론이 드높았다. 이 때문에 오랜 시간 워싱턴 입성을 준비해 온 한인들의 도전이 주목을 받았다. 뉴저지에서 출마한 앤디 김(Andy Kim·민주당)을 비롯해 캘리포니아 영 김(Young Kim·공화당), 버지니아 토마스 오(Thomas Oh·공화당), 펜실베이니아에서는 펄 김(Pearl Kim·공화당) 등이 그 주인공이다. 11월6일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앤디 김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는 등 이들의 땀방울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200만 명에 달하는 미국 내 한인사회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 선거 내내 ‘아메리칸 드림’ 자부심 내비친 앤디 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중간평가 성격으로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선 한인 2세로는 최초로 연방 하원에 입성한 주인공이 탄생했다. 뉴저지 제3선거구에 출마한 앤디 김 당선인(36)이다. 그는 11월14일 49.9%의 최종 득표율로 현역의원인 톰 맥아더 공화당 후보(48.8%)를 누르고 당선을 확정했다. 김창준(공화) 전 연방 하원의원 이후 20년 만에 연방 의회에 입성한 한국계이면서도, 민주당 소속으론 한인 역사상 첫 연방 하원의원이기도 하다.
앤디 김은 한국말이 서툴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적지 않은 이민 2세대다. 김 당선인은 선거운동 때부터 이민 1세대인 부모님에 이어 자신 역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이뤘다는 점을 자부해 왔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김정한씨(71)는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를 거쳐 유전공학 박사로 자리를 잡았다. 가난한 시골에서 성장한 어머니 역시 간호사로서 뉴저지주에서 많은 환자를 돌본 것으로 전해졌다.
앤디 김은 뉴저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시카고대를 졸업했다.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9년 9월 중동 전문가로서 국무부에 첫발을 디딘 뒤, 201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의 전략 참모를 지냈다. 2013년부터 2015년 2월까지는 미 국방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각각 이라크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특히 2013년에는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전문가로서 오바마 행정부의 IS에 대한 폭격과 인도주의 지원을 담당하는 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앤디 김은 시사저널과의 11월14일(미 현지 시각)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인사회의 지지에 대해 감사드린다. 의회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이민자의 아들, 한국 이민자의 아들이 연방 하원 선거에 도전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군사위원회를 1순위로 지망한다는 그는 “하원의원으로서 외교 문제에 관해 큰 목소리를 내고 싶다. 한반도 문제는 저의 최우선 과제(Top list)”라며 “한·미 정부 관계가 태평양·아시아 지역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고 있고, 저도 한·미 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일찌감치 독도·위안부 문제 알린 영 김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미 연방 하원선거 캘리포니아 제39선거구에 출마해 박빙의 승부 끝에 막판 아쉽게 역전패한 영 김 후보다. 공화당 소속인 영 김 후보는 7일 오전 8시 개표율이 97% 진행된 시점까지만 해도 득표율 51.4%로, 민주당 길 시스네로스 후보(48.6%)를 2.8% 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우편투표까지 합산하면서 격차가 좁혀졌고 결국 역전패했다. CNN 집계에 의하면 시스네로스 후보가 11만 3075표(50.8%) 득표해 김 후보(49.2%, 10만 9580표)보다 1.6% 포인트(3495표) 우위를 점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영 김은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13살 때인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령 괌으로 이민을 가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면서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 입학하면서 미국으로 이주, 졸업 후 금융기관에서 재무분석가로 일했다. 이후 스포츠 의류업체에서 경험을 쌓고, 숙녀복 브랜드로 발을 넓혀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후 영 김은 남편 찰스를 통해 정계에 첫발을 디뎠다. 오렌지카운티 비영리기구에서 일한 남편은 한미위원회를 만든 지한파(知韓派) 에드 로이스 의원과 자주 식사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로이스 의원이 남편을 통해 영 김에게 보좌관 자리를 제의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 주 상원의원이던 로이스가 연방 하원의원이 되면서 이후 영 김은 21년이나 그를 보좌했다. 워싱턴DC에선 한미의원연맹 일을 도우면서 한국 정계에도 인맥을 넓혔다. 로이스 전 의원이 독도 명칭 교체, 위안부 문제에 적극 나선 것도 영 김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정치에 도전한 건 2014년. 캘리포니아 주의회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 현역 샤론 쿼크 실바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주의회에 진출한다. 그러나 2년 뒤 리턴매치에선 실바에게 석패했다. 영 김은 이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집행관) 선거를 준비했으나 로이스 전 의원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지역구를 물려받아 하원으로 진로를 바꿨다. 지난 6월 정글 프라이머리로 불리는 예비선거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해 본선에 올랐다.
※계속해서 ☞ 기사가 이어집니다.
※연관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