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정 협의체’ 의제 두고 대통령실-한동훈 정면충돌
용산 “2025년 정원 논의 불가” 한동훈 “의제 제한 없어야”
與, 정부에 불만 기류 확산…‘尹은 실점, 韓이 득점’ 시각도
전당대회 후 잠잠하던 ‘윤-한(윤석열-한동훈) 갈등설’이 재발화하는 양상이다. 의대 증원을 둔 의정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상반된 진단과 해법을 내놓으면서다. 대통령실과 여당 모두 여·야·의·정(여야‧의사단체‧정부) 협의체 구성엔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대통령실은 ‘2025년 의대 정원 재논의 불가’ 방침을, 한 대표는 ‘의제 제한 없는 토론’에 방점을 찍으며 이견을 보이고 있다.
여권 일각에는 이번 용산과의 충돌이 한 대표에겐 정치적으로 실(失)보다 득(得)이 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채상병 제3자 특검’과 달리 의정갈등 국면에선 ‘윤심’(윤 대통령 의중) 보다 ‘한심’(한 대표 의중)에 힘이 실리는 당내 분위기가 감지되면서다.
2025년 의대 정원 두고 ‘윤-한 이견’ 팽팽
당초 한동훈 대표는 추석 전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야당도 호응했다. 이후 여당 지도부는 협상 테이블에 의료계를 앉히고자 총력전에 나섰다. 한 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가 각 의사 단체에 직접 연락해 ‘일단 협의체에 나와 달라’고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당의 노력에도 협의체는 첫 삽도 뜨지 못하는 모습이다. 의료계는 ‘2025년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를, 대통령실은 ‘논의 불가’ 방침을 고수하면서다.
국민의힘 지도부 내부에서도 대통령실 의견에 일부 힘을 싣는 의견이 나왔다. 김상훈 정책위의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지난 9일부터 우리 대학 수시 모집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의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나 학부모 입장에서도 2025년도 의대 증원을 수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의료계가) 2026년도 정원에 대한 합리적인 안을 제시해주면 제로베이스에서 검토가 가능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동훈 대표는 사뭇 다른 입장을 밝혔다. 한 대표는 협의체에서 논의하지 못할 주제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이 검토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은 ‘2025년 의대 증원’을 포함해 야권에선 주장하는 ‘보건복지부 장‧차관 경질’까지 협의체에서 같이 논의해보자는 게 한 대표의 구상이다. 조건을 걸기 시작하면 ‘판’이 깔리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한 대표는 전날 오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의료계가 요구하는 2025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와 (보건복지부) 장‧차관 경질도 함께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냐’는 질문에 “모여서 무슨 얘기인들 못하겠느냐.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협의체 출범 전제조건으로 뭐 안 된다 이런 건 없다”며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생각이 다르니 만나서 대화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화가 출발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가 한 대표의 입장을 수용할지는 불분명하다. 교육부는 전날 이례적으로 의과대학 수시모집 원서접수 현황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9일 접수 첫날 31개 의대 첫날 경쟁률이 1.14대1로 지원자가 이미 모집인원을 넘어섰다. 내년도 증원계획이 반영된 전체 정원 4610명의 67.6%가 수시모집으로 선발되는 점을 고려하면, 의료계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다.
일각에는 윤 대통령이 한 대표의 태도에 불쾌감을 표했다는 전언도 들린다. 대통령의 ‘공약 이행 동력’을 여당 대표가 되레 꺾으려 한다는 불만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최근 한 대표를 제외하고 윤상현 의원과 일부 최고위원들만을 관저로 초대해 비공개 만찬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윤 대통령이 가장 긴밀히 소통해야 할 당 대표를 ‘패싱’하고 다른 인사들과 정국 주요 현안을 논의한 것을 두고, 사실상 당 지도부를 향한 ‘불신’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윤 대통령이 한 대표를 만찬에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나. 한 대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의대 증원을 백지화하는 순간 개혁이 실패한다고 보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거부하는 여당 대표의 말에는 힘이 실릴 수가 없다”고 진단했다.
“국민 인내심 곧 바닥”…추석 앞 與 ‘노심초사’
그러나 여권 일각에선 시간이 흐를수록 ‘윤심’보다는 ‘한심’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대표가 주장한 ‘채상병 제3자 특검’의 경우 용산뿐 아니라 친윤계의 거센 반대가 발목을 잡았다. 반면 이번 의료대란 앞에선 친한계뿐 아니라 친윤계 내부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목소리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최근 김종혁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뿐 아니라 안철수‧나경원 의원 등 중진의원들까지 나서 ‘보건복지부 장‧차관 경질’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를 향해 ‘실정’을 인정하라고 압박한 셈이다.
PK(부산‧경남) 지역구의 국민의힘 한 중진의원은 “(의대 증원) ‘숫자’를 두고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정부의 상황 판단이 안이하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못된 민심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건 계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연찬회에서도 초선, 중진 할 것 없이 의정갈등에 공개적인 우려를 표했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 배경으론 ‘민심’에 들어온 빨간불이 꼽힌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2~6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2508명을 대상으로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2.0%포인트)한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긍정 평가는 29.9%로 집계됐다. 리얼미터 조사에서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리얼미터는 “응급실 공백 악화, 인요한 국민의힘 최고위원의 수술 청탁 의혹 등 대치 국면에 놓인 정책 리스크가 부정적인 요인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분석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는 전날 방송된 시사저널TV 《시사끝짱》에 출연해 “‘응급실 뺑뺑이’로 사망사건이 발생하고 돌발 사태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니 국민 인내심도 임계점을 넘어선 것”이라며 “모든 개혁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의 주체가 국민이라면 (개혁의) 판단은 (정부가 아닌) 국민이 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 논의는 한동훈 대표가 자신의 뜻을 관철한 결과다. 논의가 시작됐다는 것만으로도 한 대표가 득점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평가했다.
한편, 한 대표는 오는 12일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위한 고위당정협의회를 주재하고 의대 증원 과정에서 불거진 응급실 대란 사태를 정부·대통령실과 함께 논의한다. 협의회에 앞서 김상훈 정책위의장은 의사 출신인 인요한 최고위원, 한지아 수석대변인 등 당 지도부와 함께 서울 모처에서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들을 만나 의료계 의견을 청취할 예정이다. 의협 관계자들을 만나고 고위당정에서 의견을 수렴해 추석 연휴 전 의료 공백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내겠다는 방침이다.
인용한 여론조사는 이번 조사는 무선(97%)·유선(3%) 자동응답 방식, 무작위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법으로 실시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