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장편소설에 기반한 영화…관계와 연결의 순간 보여줘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
세상이 요구하는 평범함과 정상성의 틀에서 비껴나는 딸을 보며 엄마는 생각한다. 앞으로 내 딸이 비참해지지 않을 방도가 있는가. 찰나의 젊음이 지나가고 날로 늙어가는 육체와 그럼에도 끝나지 않는 노동의 굴레 안에서 그저 죽음을 향해 가는 길고 긴 경로. 가족이라는 확실한 예속이 아니라 ‘친구나 애인 따위의 허술한 관계’들과 함께 어떻게 그 험한 길을 걸어갈 것인가.
영화 《딸에 대하여》의 원작은 김혜진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이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한 편으로, 앞서 《보건교사 안은영》과 《82년생 김지영》 등의 작품이 영화로 나왔다. 나이 듦과 돌봄과 노동의 문제, 갈수록 그 의미를 재편하고 확장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타인을 향한 이해라는 주제를 향해 나아갔던 원작의 확장성은 이미랑 감독의 연출 안에서도 섬세하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원작의 문장들을 영화적 언어로 옮기다
독립했던 딸이 경제적 상황 때문에 엄마(오민애) 집으로 돌아온다. 7년을 사귄 동성 애인과 함께. 서로를 그린(임세미)과 레인(하윤경)이라 부르는 이들의 등장이 엄마는 전혀 달갑지 않다. 그린은 엄마의 그런 부대낌을 알면서도 대충 상황을 뭉개며 집과 일터를 오가고, 레인은 연인의 모녀 사이에서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맞이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이어가려 노력한다.
집이 갈등의 공간이라면,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일터는 돌봄의 공간이다. 엄마는 무연고자 치매 노인 제희(허진)를 정성껏 돌보고 있다. 찾는 이 하나 없이 매일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자꾸만 자신의 근미래를, 나아가 딸의 먼 미래를 대입한다.
작품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진행은 책과 영화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이미랑 감독은 엄마의 입장에서 서술한 긴 독백이 특징인 원작의 구성을 내레이션 등의 대사 전달로 가져오는 대신, 매 장면을 꼼꼼하게 구성하고 이어가며 의미를 발생시키는 영화만의 영상 언어로써 더 적극적으로 구현한다. 침묵과 여백, 시선의 교환과 엇갈림은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탁월하게 재구성한다. 이창동 감독 연출작 《시》(2010), 장률 감독 연출작 《춘몽》(2016)에서 스크립터로 일했던 이미랑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엄마는 부당한 일을 겪은 타인의 권리 주장을 위해 앞장서고, 평범하게 가족을 꾸려 자식을 낳고 기르는 삶의 고단함을 선택하지 않은 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바닥의 못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딸을 두고 수군거릴 사람들의 평가는 엄마에게 예견된 수치심이다.
원작의 표현 안에서 딸은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반면 딸은 사회가 만든 정상성을 강요하는 엄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싫은 건 싫다고,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말하고 살라 가르쳐 놓고 정작 그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틀린 것이라 지적하는 엄마는 딸에게 모순적 존재다.
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엄마와 그 세대를 향한 고찰이 더 많은 비중으로 쏟아지는 출판 및 영화 시장에서, 엄마의 시선으로 경유되는 《딸에 대하여》는 귀한 존재감을 지닌다. 이름이 지워진 엄마. 《딸에 대하여》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원작에는 엄마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으며, 영화에는 이력서에 잠시 등장하지만 별다른 비중을 지니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중장년 세대에게 엄마는 개인을 지우는 호명이다. 나 자신보다 자식을 낳고 기른 사람으로 사는 것, 이름보다 자격으로 가치를 획득하는 자리. 그런 엄마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서로를 호명하는 딸과 그의 연인이, 혈연 가족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과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이들의 고민이 고깝기만 하다.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레인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가치관이 합치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모녀 관계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인 동시에, 필요한 말들을 적확하게 꺼내는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관계를 인정받고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같이 있는 거, 그거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레인의 정확한 지적에 엄마는 입을 다문다. 모녀가 아니기에 그나마 이성적일 수 있는 한 토막의 대화. 영화 내내 레인과 엄마의 부딪침과 분절적 대화가 실어 나르는 것은 꼭 필요한 ‘당사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 다가올 미래인 사람들
원작이 그러하듯 영화는 엄마가 바라보는 딸의 이야기에서 점차 늙고 나이 든 존재, 나아가 이성애 중심 가족의 정상성을 옹호하는 사회에 가려진 이들로까지 시선을 확장해 간다. 여기엔 퀴어뿐 아니라 노약자, 무연고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어떤 식으로든 일정 부분 그림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죽을 때까지 노동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버거운 막막함도 있다. 외부의 시선에서 인물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 내면의 작동을 따라가는 방식은 이 영화의 사려를 알게 한다.
연고가 없는 제희를 향한 엄마의 마음은 측은지심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제희에게서 자신과 딸의 앞날을 본다. 제희는 젊은 시절 연고도 없는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젊은 날의 힘과 마음과 시간을 타인에게 함부로 나눠준 사람.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돌보지 않으며 심지어 모두의 기억에서 무심하게 잊히는 중인 그의 삶이 자신과 딸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엄마는 사로잡힌다.
그러니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제희를 포기하지 못하는 엄마의 고집은, 부당 해고당한 동료를 위해 앞장서는 그린의 상황과 기실 다를 것이 없다. 부당한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닮아있는 둘.
김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소설을 쓰는 동안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리고 이 구절을 인상 깊게 읽은 이미랑 감독은 영화를 통해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색해 보고자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딸에 대하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화가 되고자 한다. 이 영화의 지향점은 명쾌한 봉합과 깔끔한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타인을 향한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의 영역임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갈등과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사랑하는 일은 가능한가.
《딸에 대하여》는 ‘그럼에도’ 만들어지는 관계와 연결의 순간들, 너와 나를 떠나 모든 세대와 사람들의 이야기로 퍼져가는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고, 다가올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