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보다 사격 김예지 선수의 카리스마적 캐릭터에 더 열광
21세기에 적응하기 어려운 20세기의 행사 ‘올림픽’
7월26일부터 8월11일까지 16일간 진행되었던 ‘세계인의 축제’, 2024년 파리올림픽도 막을 내렸다. 4년에 한 번씩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다 보니 이번 올림픽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설이 많았다. 그리고 이런 국제 행사에 따라오는 논란은 특정 인구집단이나 세대의 여론과 감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가 되어준다.
‘선진국 프랑스’, 더는 선망할 것이 없다
먼저 ‘선진국 신화’가 흔들린 것에 주목해볼 만하다. 첫 행사인 개막식부터 문제가 되었다. 특히 개막식 공연에서 성소수자 관련 표현은 세계적인 논쟁을 만들었다. 행사 운영에 대한 볼멘소리도 뒤따랐다.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친환경 올림픽을 위해 숙소나 선수 이동 차량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아 선수들이 더위를 호소했고, 채식 위주의 식단을 제공해 선수들이 육류를 더 달라고 아우성쳤다는 보도도 나왔다.
개막식 논란과 행사 운영에서 나타난 차질은 최근 청년층에게서 유의미하게 관찰되는 유럽에 대한 불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20년, 혹은 10년 전만 해도 유럽이 한국보다 더 부유하고 잘 운영되는 사회라는 통념은 강고했다. 대중매체나 지식인들은 유럽의 선진성을 소개하며, 독일·프랑스·영국 등의 장점 중 한국이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를 매일같이 소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상황은 급변했다. 유럽은 장기 침체가 계속된 반면 한국은 성장을 이어나가 격차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특히 ‘개도국 콤플렉스’가 약하고, 서구권에서 여행과 취업을 할 기회가 이전 세대보다 많았던 청년층은 ‘막상 살아보니 이 사회도 나름의 문제가 있다’는 정서를 솔직히 드러낼 수 있었다.
경제적 격차가 좁혀진 것 이상으로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도약한 것도 콤플렉스를 걷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특히 정치적 올바름이나 환경 이슈에 대해서는 과거 유럽의 제국주의 등을 거론하며 유럽의 ‘위선’을 반대로 조롱하는 반응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올림픽 자체가 갖는 위상의 약화다. 물론 올림픽은 기간 내내 한국에서 큰 이슈가 되었고, 한국 선수들이 메달을 거머쥐는 경기를 많은 국민이 손에 땀을 쥐며 지켜봤다. 하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열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번 지상파 3사의 개막식 시청률 합계는 3%에 지나지 않았다. 시차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올림픽 개막식의 시청률이 각각 14%와 20%였던 게 설명이 안 된다. 시차가 이유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사람들이 올림픽에 이전처럼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 올림픽은 그야말로 20세기를 상징하는 스포츠 행사였다. 만국이 화합하는 스포츠맨십을 표어로 내걸었지만, 국기를 내건 선수들이 겨루는 경기를 사람들이 삼삼오오 TV 앞에 모여 열광하는 풍경은 20세기 민족주의와 대중사회를 상징하는 풍경이었다. 과거 대한민국과 같은 신생 개도국은 올림픽에서 선수 개인이 이루어낸 성취를 민족의 성취로 치켜세우고, ‘세계에 코리아를 널리 알리는’ 자랑스러운 쾌거로 선전했다. 개발독재 시기에 올림픽과 같은 국제적 체육 행사는 식민지배와 전쟁, 빈곤으로 위축된 자긍심을 다시 고취시키고,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불어넣는 기회였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부터 상황은 본격적으로 급변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쥐게 되면서, 미디어 소비는 파편화되었다. 가족들, 심지어 마을 사람 전체가 모여 올림픽 경기 생중계를 보며 응원하는 풍경은 사라지고, 대신에 스마트폰에서 각자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에 몰입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으로 자리 잡았다. 민족주의 열풍도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약화되었다. 2010년대부터 청년 세대들을 위주로 한국의 집단주의와 동원 문화에 반발하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선수가 메달을 따도 그건 그 선수의 성공이지 네 인생이 달라지는 건 없지 않냐’고 비꼬는 분위기도 많아졌다.
안세영 선수의 폭로와 엘리트 체육의 모순
한국이 완연한 선진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굳이 국제대회에서의 승리를 통해 민족 자긍심을 고취해야 한다는 당위도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주의가 약하고, 선진국 시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스마트폰을 통해 파편화된 미디어 소비에 익숙한 청년층으로 갈수록 올림픽에 대한 호응이 더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 배드민턴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안세영 선수의 협회에 대한 폭로 또한 올림픽, 나아가 국가와 연동된 엘리트 체육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안세영은 협회의 이익에 자신이 동원되고, 개인 활동이 부당하게 통제당했음을 고발하며 협회의 부조리를 비판했다. 반면 협회 측에서는 이는 비인기 종목인 배드민턴에서 유소년 선수를 지속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맞섰다. ‘대한민국 선수’가 지속적으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생태계를 위해 집단주의 관행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세영 입장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최상의 커리어를 만들어 보상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메달’과 ‘선수 개인의 메달’이 충돌하는 셈이다.
청년층의 여론은 반반으로 나뉘는 것 같다. 협회의 집단주의와 부조리를 비판하며 안세영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엘리트 체육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온다. 어쨌든 안세영 자신도 수익이 나지 않는 배드민턴이라는 종목에서 선수로 성장한 것은 집단주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 덕택이 아니냐는 것이다.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이전에 비해 몹시 저조해지면서,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현재의 체육계 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파리올림픽이 남긴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례는 사격의 김예지 선수다. 공기권총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 특유의 카리스마적 캐릭터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일론 머스크도 X(트위터)에서 ‘액션 영화를 찍어도 될 것 같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오히려 같은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오예진 선수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았다.
사실 올림픽 경기를 TV 앞에서 실황으로 보는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청년층은 유튜브를 통해 짧은 하이라이트를 보거나, 선수들을 일종의 아이돌이나 밈으로 여전히 활발히 소비하고 있다. 소비의 패턴이 ‘민족’과 ‘경기’보다도, ‘선수 개인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모양새다. 새로운 세대가 기존과 같이 올림픽을 소비하지 않게 되면서 깊어지고 있는 체육계의 고민은, 완전히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느냐에 따라 해결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