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의 ‘지난 10년’이 알려준 것들
청량하고 고급스러운 댄스 비트, 은근하게 착 달라붙는 감성적인 멜로디, 섬세하지만 파워풀한 보컬,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노랫말. 《Cosmic》은 레드벨벳이 지난 10년을 통해 K팝 신에서 꾸준히 차별화하고자 했던 모든 방식의 편린과도 같다.
사실 K팝에서 ‘차이’는 대부분 비주얼을 핵심으로 둔 콘셉트나 돋보이는 몇몇 멤버의 개인적인 매력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트레이닝이나 음악 제작의 프로세스가 공정화되고 특히 작사·작곡가나 프로듀서 등 핵심적인 인력들이 적어도 같은 기획사 내에서는 완전히 공유되는 상황에서, 그 차이는 점점 미묘한 것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 K팝 그룹의 ‘개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레드벨벳은 K팝이 보유한 가장 ‘K팝스러운’ 그룹이면서, 적어도 이 산업을 오래 지켜봐온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그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그룹으로 자리 잡아왔다.
K팝의 확장을 이끌어낸 웰메이드 음악
레드벨벳의 차별화는 무엇보다도 음악에서 비롯된다. K팝이 현재의 위상을 갖기까지 그 여정을 대표하는 그룹들이 여럿 있었다. 아마 인지도나 앨범 판매량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레드벨벳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성공한 팀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디스코그래피의 충실함과 레퍼토리의 다채로움, 특히 영미권 대중음악에 뒤지지 않는 트렌디함과 실험성을 고루 잡은 음악적 완성도까지 생각한다면 레드벨벳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분명히 떠오르는 이름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 아이돌은 인상적인 몇몇 타이틀곡만으로 회자되곤 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곡이 매년 쏟아지고 있음에도, 아이돌을 ‘앨범 아티스트’로 떠올리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현실을 감안할 때 레드벨벳은 대단히 이례적인 그룹이다. 대중에게 레드벨벳은 《빨간맛》이나 《Psycho》 같은 히트곡으로 기억되는 지극히 대중적인 걸그룹이지만, K팝 마니아나 흔히 ‘덕후’라고 불리는 핵심 청자들에게는 《Kingdom Come》이나 《Oh! Boy》 등 ‘띵곡’이라는 속어로도 표현되는 명곡을 누구보다 많이 보유하고 있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수록곡들은 팬들에게 종종 타이틀 곡 이상의 명성을 갖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음악적인 성취에는 K팝 현대화를 리드해온 SM엔터테인먼트(SM)의 누적된 노하우가 있었다. S.E.S.와 소녀시대, f(x) 등의 걸그룹을 성공적으로 론칭한 경험을 지닌 SM은 레드벨벳에 이르러 대중성과 실험성이 균형 있게 결합된 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한창 물오른 A&R팀의 능력, 송캠프를 통한 국내외 작가진의 성공적인 콜라보레이션으로 이전에 비해 한결 풍성한 레퍼토리를 구축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3세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K팝 프로덕션의 정점이 바로 레드벨벳의 커리어에 면면히 담겨 있는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타이틀 곡 한 곡과 필러(filler)라 불리는 다수의 평범한 수록곡으로 채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상황에서 레드벨벳은 고른 완성도를 가진 앨범을 꾸준히 선보여 왔으며,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 K팝의 질적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레드벨벳은 K팝에 무관심하던 일반 음악팬들을 대거 신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K팝과 거리가 있던 장르음악의 창작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됐다. 특히 《Kingdom Come》 등을 작곡한 디즈(Deez), 이번 앨범의 수록곡 《Bubble》을 만든 수민(SUMIN) 등 R&B 계열의 음악가들이 레드벨벳의 음악에 빈번히 참여하면서 가벼운 일렉트로 팝 위주였던 K팝 사운드에도 큰 변화가 만들어졌다.
레드벨벳 특유의 트렌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블랙뮤직풍 K팝은 북미시장에서의 저변을 넓히는 한편, 대중적이지만은 않은 퀄리티 있는 걸그룹을 만들고자 하는 제작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레드벨벳 이후 등장한 수많은 걸그룹이 일정 부분 레드벨벳 특유의 색깔이나 성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은 굳이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쉽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여전히 평가절하된 보컬그룹
아이돌 음악에서 퍼포먼스나 비주얼에 가려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보컬이다. 특히 레드벨벳처럼 개성 있는 보컬 라인업을 구축한 팀에 보컬은 단지 퍼포먼스를 이루는 일부가 아니라 종종 본질이 된다. 레드벨벳은 보컬 개개인의 기량과 그룹으로서의 앙상블이 모두 탁월한 보기 드문 그룹이다. 여성 아이돌 최고의 보컬리스트의 계보를 잇는 웬디의 목소리는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아이돌 보컬로는 극히 드문 성량과 테크닉을 가진 웬디의 보컬은 디바급 보컬에서 종종 발견되는 고음의 과잉이나 촌스러운 기교의 나열 같은 것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웬디와는 상반된 성격을 가진 슬기의 보컬은 안정된 기교를 바탕으로 곡의 모든 파트에서 고루 빛을 발하는데 이 두 재능의 합만으로도 K팝 내에서 손꼽히는 보컬그룹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하지만 보컬그룹으로서 레드벨벳의 장점은 테크닉의 총합이 아닌 음색과 개성의 고른 분포와 조화다. 조이의 보컬은 음색의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특유의 섬세한 감성에서 나오는 음색은 종종 레드벨벳의 시그니처 사운드로 인식될 정도다. 차갑고 세련된 비주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담백한 세련미가 강점인 아이린, 걸그룹 특유의 소녀적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예리 역시 보컬그룹 레드벨벳의 ‘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음색이 개별적으로 선보여졌을 때뿐 아니라 앙상블로 연주될 때 큰 매력을 전해 준다는 것이다. 화음과는 또 다른 의미의 조화로, 이는 멤버들이 모두 한 음을 부르는 유니슨 상황에서 뚜렷하게 발견된다. 훌륭한 음색의 합 이상으로 그것이 어울리면서 나오는, 일종의 배음을 통해 전해지는 이 같은 목소리의 개성은 많은 이가 레드벨벳의 음악을 좋아하는, 하지만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유명한 그룹은 많다. 잘하는 그룹은 더 많다. 하지만 신뢰감을 주는, 그것도 아티스트를 아끼고 좋아하는 팬덤을 넘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까지 보편적인 믿음을 주는 아이돌 그룹을 찾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레드벨벳이 지켜온 것은 그래서 단순히 ‘인기’가 아니라 ‘평판’이다. 신에서 가장 풍성한 레퍼토리를 보유한 그룹이라는 평가와 그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 그것은 어쩌면 아티스트와 팬의 유대관계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며 변하지 말아야 할 K팝의 기본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