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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 도서 목록에 성교육 아닌 철학·문학·과학 분야도 포함
전문가가 인정한 책을 비전문 단체들의 압력으로 폐기해

최근 경기도 내 학교 도서관에서 성평등과 성교육 관련 도서 2500여 권이 폐기처분된 사건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사건은 일부 보수단체의 민원에 의해 경기도교육청이 각 학교에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를 조치하라’는 공문을 발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왜 필요했는지, 어떤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단순히 도서의 폐기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과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예컨대 성교육과 성평등에 대한 도서들이 과연 유해한 것인지, 유해하다는 기준은 무엇인지, 이러한 도서들이 학생들에게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다.

6월12일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와 일부 시민단체가 최근 1년 사이 경기 지역 학교 도서관에서 성교육·성평등 도서가 대규모 폐기된 데 대해 경기도교육청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6월12일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와 일부 시민단체가 최근 1년 사이 경기 지역 학교 도서관에서 성교육·성평등 도서가 대규모 폐기된 데 대해 경기도교육청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서관에서 그 책 빼라” 압력에 업무 마비

경기도 성평등 도서 폐기 사건의 배경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0년 ‘나다움 어린이책’이 보수단체들의 민원으로 여러 학교와 도서관에서 폐기된 사건이 그 시작이다. ‘나다움 어린이책’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성인지감수성을 배울 수 있는 책’을 선정해 일부 초등학교에 보급하는 정책으로, 2019년과 2020년 총 199권의 도서를 선정했다. 그러나 보수 성향 학부모단체와 한 국회의원의 문제 제기 및 그에 따른 부정적 여론으로, 여가부는 그중 7권을 전량 회수했다. 이에 대해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비판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충남 지역에서 성교육 및 성평등 관련 도서들이 대규모로 폐기되었다. 지난해 5월경부터 보수 성향 학부모단체들은 충남 일대의 공공도서관 항의 방문과 전화 민원 등을 통해 ‘문제 도서’ 120종을 도서관에서 폐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지속적인 민원 제기와 항의로 도서관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짜고짜 “도서관에서 그 책 빼라”며 걸려오는 전화에 유선전화 코드를 뽑아놓기까지 했으나, 주 5일 내내 찾아와서 민원을 넣는 바람에 사서들이 버틸 수 없어 결국 도서관에서는 몇 종의 책들을 서가에서 빼기에 이르렀다. 인권단체와 출판단체 등은 이런 움직임을 ‘도서 검열’로 규정하고 독자의 알 권리와 독서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경기도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라는 명목으로 2528권이 폐기처분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경기도교육청에 ‘청소년 유해도서를 분리 제거해 달라’는 내용의 보수단체 민원이 접수됨에 따라 경기도교육청이 같은 해 11월 각 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 협의해 조치하라”는 공문을 두 차례 보냈다. 또한 올해 3월에도 ‘(폐기)처리된 도서 집계 목록’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처리 결과에는 ‘제적 및 폐기’와 ‘열람 제한’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다. 경기도교육청은 학교 도서관운영위원회에 공문을 전달하며 문체부의 청소년 유해 매체 심의 기준을 안내했으나, 폐기하라고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위와 같이 학교에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학생과 교사의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로 비판받고 있다. 

실제로 민원이 제기되어 회수되거나 폐기처분된 책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그 책들이 왜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도서인지에 대한 타당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국내외에서 우수도서로 평가받은 책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성교육 책이 아닌 과학책이나 역사책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서 80권 이상 폐기된 《사춘기 내 몸 사용 설명서》는 2013년 독일에서 올해의 과학도서상을 받은 성교육 책으로, 국내 출간 시 아동인권 전문가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감수를 거쳤다.

《10대들을 위한 성교육》은 영국 교육 전문지에서 올해의 지식상을 받았던 우수도서다.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는 스웨덴 정부로부터 ‘성평등 전문가’로 공인받아 성교육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가 쓴 책으로, 스웨덴에서 최우수 청소년 도서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18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호평을 받은 책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 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인 《어린이 페미니즘 학교》와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된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도 학교도서관에서 제적됐다.

 

부커상 수상작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포함

이뿐 아니라 폐기 도서 목록에는 성교육이 아닌 철학·문학·과학 분야 서적도 포함됐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 같은 현대 문학작품이 성교육 도서로 분류되었다. 또한 50만 부 넘게 판매된 정재승 교수의 학습동화 시리즈 중 《인간은 외모에 집착한다》 편도 폐기 도서 목록에 포함되었다.

실제로 필자의 역서 중 하나인 《벨 훅스, 당신과 나의 공동체》가 지난해 4월 충남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민감한 주제를 담은 도서’이기에 희망도서 신청이 거절당했다는 지인의 연락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해당 도서는 영문학자인 저자가 교육에 관해 쓴 3권의 시리즈 중 한 권으로, 교육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내용을 담고 있어 미국에서는 모든 교육자가 읽어야 할 책으로 꼽히기도 하는 책이다. 해당 도서관에서는 ‘이런 주제의 책들이 도서관에 들어오면 항의하는 이용자들이 있다’며 구입신청을 거절했다고 하니, 성교육 도서 폐기는 단지 몇 권의 책을 폐기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양질의 도서를 구입조차 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현상을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성평등 및 성교육 도서 폐기는 학생들의 교육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필수적인 성교육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행위다. 올바른 성교육은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기반이며, 학생들이 건강한 성 인식을 형성하도록 하고 각종 성폭력과 성별에 기반한 차별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것은 대체 누구의 기준에서 어떤 이유로 유해하다는 것인가.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은 책을 해당 내용의 전문가가 아닌 단지 보수단체의 주장만을 듣고 폐기하는 일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 양질의 도서를 폐기하는 대신, 더욱 풍부한 성교육 자료를 제공해 학생들의 성평등 의식을 함양하도록 하고, 여성 및 성소수자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청과 학교, 지역사회가 협력을 통해 성평등 교육을 강화해 학생들이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보호하며, 유네스코에서 권고하는 포괄적 성교육(성에 대한 인지·감성·신체·사회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을 강화해 어린 시절부터 여아와 남아, 여성청소년과 남성청소년이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양질의 도서를 폐기할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성교육과 성평등 도서가 출간되고 널리 읽혀, 여성과 남성 모두가 존엄과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향한 도약의 발판이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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