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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쓰레기가 침식하는 에코사이드 경고한 김정아 작가

작품 《9시 46분》은 2020년 기준 지구 생태 위기 시각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시간이 2시간14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김정아 작가(54)는 경남 거제도 해변에 상륙한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 인간이 만든 그대로의 원형을 유지한 플라스틱류를 오브제 삼아 ‘인간의 종말’을 화면에 펼쳐 놓는다.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더글러스 하우스’(1973)는 벽난로의 굴뚝과 외부 계단이 파사드(입면)로 돌출되어 미시간호 주변 환경과 어울려 그림 같은 의미인 픽처레스크(picturesque)를 실물 비주얼로 보여준다. 김정아 작가의 동명(同名) 작품 《픽처레스크》는 노을 지는 아름다운 수변에 쓰레기가 캔버스 밖으로 흘러넘친다. 기이한 풍경 너머 현대 건축의 아이콘이 어른거렸다.

ⓒ시사저널 임준선
ⓒ시사저널 임준선

해양 플라스틱류를 존재로 인식하기까지

주변이 바다인 작가에게 일상의 삶은 어린 시절 가졌던 고립감과 겹쳐 해변으로 떠밀려온 색 바랜 플라스틱류 해양쓰레기에 천착하게 되었다. 2011년 바다 환경 오염으로 인한 생물 피해 세미나에 참석한 게 해양 생태계 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지나간 시간, 버려진 공간, 사라진 사물과 함께한, 흘러온 듯 떠돈 듯한 자신의 존재에 비추어 고민했다. 나이에 비해 생각도 늦고 뭐든 늦었지만 시선과 사고는 고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정서적·공간적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아포리아(aporia·막다른 곳에 다다르다)의 눈을 가진 김정아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모퉁이, 구석진 자리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 철학자 케이시의 관점에서 장소는 몸을 중심으로 지각되는 영역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장소는 몸이 인지하는 경계의 영역이면서 공간이나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다. 작가의 화폭에 펼쳐진 곳은 숱한 이야기들을 은닉하고 있다.

장소성(placeness)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유대는 사유로 발전한다. 보았으나 보지 못했고,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보고 듣는 종교적 인간(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의 탐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기형도의 시 《엄마 생각》을 언급했다. 그는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내 유년의 윗목’으로 인해 서울과 고향인 전주를 부유하듯 옮겨 다녔다. 미술대학의 제도화된 화법(畵法), 전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잘 쓰지 않는 색을 골라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 1976)는 집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것들을 ‘존재의 장소화’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숲길》 다섯 번째 글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구획된 성역, 다시 말해 존재의 집이다.” 화가에게 언어는 시각화한 이미지다.

김정아는 자신이 이미지로 만든 현장, 장소가 사회적 담론이 되기를 기대한다. 결혼 후 가족과 함께 경남 거제도로 이주했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내고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붓질을 시작하며 눈에 들어온 게 해변에 상륙해 난파되어 고립된 해양쓰레기들이었다. 플라스틱이 바다를 떠돌며 강한 햇볕에 바래고 낡아진 색들은 왠지 익숙했다. 학창 시절, 주변으로부터 핀잔을 들으면서도 골라 쓴 그 색들이었다. 이들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을까. 그들이 떠돌아 다닌 시간과 자신의 시간이 겹쳐졌다. 쓰레기로 취급되는 해양 플라스틱류가 존재를 인식하는 매개로 와 닿았다. 

하이데거는 명저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대신 ‘현존재’를 내세웠다. 실존하는 현존재는 스스로 선택하고 개선하려는 ‘본래성’과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는 ‘비본래성’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모든 시대와 문화에 통용되는 불변의 유일한 존재는 없다.

그렇다. 작가에게 누군가에게 떠밀려와 쌓여 해변에 묘지를 이룬 쓰레기 더미는 시공간을 아우르는 예술적 장치가 되었다.

숱한 만남과 모임들, 식사 자리와 파티, 테이블에 잘 차려진 음식 사진들은 흔하지만 취하고 흐트러진 사람들의 모습은 잘 없다. 어느 날 불현듯 만찬의 후식으로 나온 과일이 사라지고 꼬다리만 남은 빈 접시가 애잔하고 예뻐 보였다. 사람들끼리의 부대낌과 대화의 열정이 사라진 빈 시간과 공간에 들어온 흔적들이었다.

9시 46분, 패널에 아크릴릭,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marine debris) 87x87cm 2021 ⓒ심정택 제공
9시 46분, 패널에 아크릴릭,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marine debris) 87x87cm 2021 ⓒ심정택 제공
픽처레스크-노을, 액자 패널에 유화, 바다쓰레기 71x81cm 2018 ⓒ심정택 제공
픽처레스크-노을, 액자 패널에 유화, 바다쓰레기 71x81cm 2018 ⓒ심정택 제공

에코사이드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예술이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하는지 보면서 예술 작품이 갖는 ‘사물성’에 대한 오래된 통념을 살폈다. 예술 작품의 근원은, 진리를 작품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진리란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앎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사물의 어둠과 밝음, 나아가고 물러서는, 드러나고 숨는 생동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정아 작가의 드러나고 숨은 생동감 가득한 화면 구성의 대상들을 보면 생경한 느낌이 든다. 블랙홀과도 같은 바다를 거쳐온 인간이 생산해낸 익숙한 사물들을 매개로, 다가올 초현실적인 순간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해변의 묘지》는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가 고향 세트에서 영감을 받아 죽음에 대해 적은 시다. 삶을 비관하던 시인은 사유의 격랑 끝에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 《해변의 묘지》 (민음사, 2022, 김현 번역)

폴 발레리의 시대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실존의 사유 이전에 해양쓰레기 문제를 해결해야 살 수 있다. 작가는 대규모 자연환경 파괴행위를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 향하는 ‘에코사이드(생태 살해, ecocide)’라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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