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어 《졸업》까지
사적인 사랑의 차원 넘어 사회적 의미 드러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에 이어 《졸업》까지, 이제는 안판석 감독표 멜로를 이야기해도 될 법한 상황이다. 달달한 로맨스와 더불어 사회적 메시지까지 멜로의 새로운 지평을 그려내고 있는 그 작품들에는 어떤 특징들이 숨겨져 있을까.
로맨스에 녹여낸 입시교육의 현실
tvN 토일드라마 《졸업》은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잘나가는 국어강사 서혜진(정려원)과 그의 첫 제자로 그 학원에 강사로 들어온 이준호(위하준)가 그려 나가는 로맨스다. 누가 봐도 멜로 드라마라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었던 연상연하 커플은 점점 가까워지면서 학원에서의 비밀 연애를 시작하고, 서로가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한밤중에도 달려가는 설렘 가득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멜로 드라마에는 또 다른 장르적 색깔이 담겨 있다. 마치 《미생》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치열한 생업 전선의 경쟁적인 현실을 그리는 오피스 드라마적인 색깔이다. 서혜진은 시험지 오답 문제로 학교 국어 선생님과 한판 대결을 벌이기도 하고, 이준호와 함께 ‘사제출격’이라는 공동강의를 개설해 다른 학교의 학생들을 끌어들이려는 학원가의 치열한 경쟁 속에 뛰어들기도 한다. 또 잘나가는 서혜진 선생이 혹여 학생들을 데리고 다른 학원으로 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이를 견제하는 원장과의 갈등이 펼쳐지기도 한다. 경쟁 학원에서 그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려고 나서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그려지기도 한다. 달달한 로맨스와 더불어, 치열한 대치동 학원가의 경쟁을 현실적으로 담고 있는 《졸업》은 이를 통해 드라마의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낸다. 치열한 현실과 그것을 이겨내게 해주는 로맨스의 달달함이 병치되는 것이다.
사실 과거라면 이러한 달달함과 치열함의 병치는 장르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대중이 장르의 공식들을 너무나 잘 이해하게 되면서, 단조로운 하나의 공식만으로 그려지는 장르물은 어딘가 심심하게 느껴지게 됐다. 《동백꽃 필 무렵》부터 《힙하게》, 최근에는 《낮과 밤이 다른 그녀》 같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멜로는 심지어 범죄 스릴러와도 엮이는 형국이다. 그러니 《졸업》이 보여주는 이러한 이질적 장르의 병치는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됐다.
또한 멜로가 그저 사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흘러가던 시절부터 좀 더 사회적인 이야기를 요구하던 대중에게 《졸업》과 같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드라마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해력을 키워야 할 국어 과목조차 ‘암기 과목’처럼 치부되는 현실 속에서 《졸업》은 진짜 ‘국어의 본질’과 입시에 의해 변질된 현실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이준호라는 첫 제자가 들어와 서혜진의 가슴에 던지는 다소 낭만적인 파격은 달달한 로맨스이면서 동시에 국어 교육에 대한 로망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로맨스와 로망은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다른 강사들과 부원장의 배신으로 인해 더러운 스캔들로 비화하는 위기 국면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러한 대결 구도 역시 로맨스와 사회적 함의를 모두 담보하는 《졸업》의 흥미로운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졸업》을 보면 안판석 감독이 최근에 해왔던 멜로 드라마들의 구조가 일관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보통의 멜로 드라마들의 구조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와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등장하는 것이지만, 안판석 감독의 멜로 드라마는 이 틀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현실적으로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 삶에 갑자기 남자 주인공이 들어오면서 변화를 겪는 이야기다.
이 새로운 형태의 멜로 드라마는 안판석 감독이 정성주 작가와 함께 만들었던 2014년작 《밀회》에서 구체화되었다. 본래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꿈이 있었지만, 생존하기 위해 예술재단 기획실장으로 들어와 성공만을 위해 재단의 부정한 일들까지 해왔던 오혜원(김희애)이 이선재(유아인)라는 천재 피아니스트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졸업》의 서혜진-이준호 구도는 어찌 보면 《밀회》의 오혜원-이선재의 학원가 버전과 유사하다. 서혜진이나 오혜원 모두 물질적으로는 충분히 성공해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 초심을 잃은 채 현실적인 생존의 이전투구 속에 들어와 있는데, 여기서 초심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이준호나 이선재 같은 인물이 들어옴으로써 생겨나는 관계의 화학 작용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 구도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도 똑같이 등장한다. 커피 회사에 다니면서 사실상 성차별과 성희롱에 가까운 직장 상사들의 요구에도 ‘회사 생활은 다 그렇다’며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던 윤진아(손예진)의 삶에 서준희(정해인)라는 인물이 들어옴으로써 생겨나는 변화를 그렸다. 서준희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윤진아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고 결국 이 문제와 싸워나가게 된다.
《밀회》부터 《졸업》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멜로의 구도는 그래서 여자 주인공의 삶에 들어오게 된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를 그리면서, 동시에 이로 인해 변화하게 된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에둘러 사회 현실의 문제들을 건드린다. 멜로 드라마가 사적인 사랑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다.
최근 들어 OTT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장르물이 많아졌지만, 사실상 우리네 드라마는 멜로 드라마가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멜로 드라마가 많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워낙 많아지면서 그 공식들이 빨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남녀 주인공을 가로막는 집안 간 갈등이나,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건 어떤 변주를 통하지 않고서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기 어렵게 됐다.
멜로, 새로운 장치들을 요구하다
이제 멜로도 새로운 장치들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글로벌 반향을 일으켰던 《눈물의 여왕》 같은 작품은 기존 신데렐라 서사의 구도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놓음으로써 시청자들을 다시 TV 앞에 앉혀놓았고, 《선재 업고 튀어》 같은 작품은 타임리프라는 판타지 설정을 더함으로써 그 강도 높은 절절한 멜로 앞에 무수한 ‘선친자’들을 탄생시켰다. 마찬가지로 《졸업》은 남녀 간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멜로의 틀을 가져왔지만, 대치동 학원가라는 특정 소재를 디테일한 사건들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평이함을 벗어났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강사들 간 치고받는 대결 구도는 멜로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극적 서사들을 가능하게 해줬다.
특히 안판석 감독표 멜로가 갖는 가치는 그간 잠시 도외시되기도 했던 멜로의 사회적 함의를 다시금 되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본래 멜로는 사적인 사랑을 다루긴 하지만, 거기에 사회적인 의미가 담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남녀 간 사랑을 가로막는 집안의 차이 같은 서사는 자본에 의해 계급화된 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바로 그 사랑과 장애물의 서사가 그려내기 마련이다. 또한 아름다운 색감과 군더더기 없는 편집, 그리고 무엇보다 멜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상적인 OST까지,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분명한 자기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다. 《졸업》 이후에도 또 다른 작품으로 새로운 소재가 더해진 멜로가 기대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