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하는 문화 뿌리 내리는 게 핵심
실효성 없는 일에 예산 낭비해선 안 돼
얼마 전, 나이 어린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갓 결혼한 그녀는 자녀 출산과 양육을 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막 다져가기 시작하는 커리어와 육아를 어떻게 병행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필자가 할 수 있었던 조언이란, 나 자신과 주변의 사례를 보았을 때 친정 부모님 혹은 시부모님이 육아를 맡아주시지 않으면 여성이 경력 단절 없이 육아를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스스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앞의 여성은 나와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왜 20년이나 시대를 앞서 산 나와 이 여성이 시대를 뛰어넘어 똑같은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최근 지자체와 정부가 발표한 저출생 대책들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5월31일, 김용호 국민의힘 서울시의원 주도로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린 ‘서울시 시민건강 출생장려 국민댄조 한마당’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이 행사의 핵심인 ‘댄조운동’은 댄스와 체조를 합친 말로 이때의 체조는 주로 골반기저근 강화 운동인 케겔운동을 의미했다. 해당 의원은 지난해 11월에 열린 ‘맨발걷기 및 국민댄조를 통한 시민건강 증진 정책포럼’에서 ‘(항문을) 조이자’며 해당 운동을 소개했고, 이것이 서울시의 출생 장려 캠페인으로 이어진 것이다. 언론보도 후 누리꾼들은 ‘황당하다’ ‘(출산이) 더 하기 싫어졌다’ ‘저출생 해법이 여성 골반 건강에 있는 것이냐’고 거센 비판을 했고, 해당 행사는 중단되었다.
댄조 운동·돈 나눠주기는 비현실적
사실 케겔운동은 죄가 없다.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인 아놀드 케겔이 1948년 최초로 제안했던 이 골반기저근 강화 운동은 골반저 일부를 구성하는 근육을 반복적으로 수축 및 이완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여성의 경우 출산 후의 복압성 요실금, 질 및 자궁 탈출을 예방하며, 출산 시 골반저 근육의 준비를 위해 임신 후기의 여성에게도 권장된다. 또한 남성의 경우도 요실금과 조루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저출생과 굳이 관련지어 보자면, 이 운동은 이미 출산했거나 임신 중인 여성의 건강 개선을 위한 것이며, 출생률 증가를 위한 방안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네티즌의 말처럼, 한국 여성의 약한 골반 근육이 저출생 현상의 원인이라는 비합리적인 믿음을 논하기 전에, 이 운동이 누구에게 효과적인 운동인지부터 따져본다면 그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6월2일에는 저출생 해결 방안으로 여아를 1년 조기 입학하도록 하자는 정책 제안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발간한 정기간행물 ‘재정포럼’ 5월호에 실린 장우현 선임연구위원의 연구보고서는 저출생 극복을 위해 이성 교제 성공을 위한 국가적 지원을 제안하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국가가 만남을 주선하자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가 여아의 조기입학이다. 남성의 발달 정도가 여성보다 느리다며, 여성을 1년 조기 입학시키면 향후 적령기의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 정책 제안에는 여아와 남아의 발달에 대한 과학적 근거도 없었으며, 여아의 1년 조기입학이 향후 이성교제 성공률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근거도 없었다. 근거 없는 제안으로 이 연구보고서는 남아는 여아보다 발달이 느려 여아보다 못한 존재로, 여아는 오로지 남성과 짝짓기를 해서 임신·출산을 하는 것이 목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18~19세기 즈음의 인식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고 했으며, 임선희 한국여성단체연합 조직국장은 “평등 관점이 부재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조세재정연구원은 개인 연구일 뿐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최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위탁하에 인구정책평가센터를 운영하게 된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이런 보고서를 공식 발간물에 실었다는 사실 자체가 무책임한 처사였다는 비판 역시 일고 있다.
저출생을 주제로 한 황당한 정책은 이뿐만이 아니다. 5월27일 서울시는 저출생 관련 대안으로 정관·난관 복원 수술비를 1인당 100만원까지 지원하며, 1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이 역시 정관 복원 수술비가 없어 출산을 안 하는 것이냐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5월29일 대구시에서는 대구 시내 거주 남성들에게 선착순으로 4000대의 정자분석기를 배포했다고 밝혔는데, 이 역시 왜 저출생 대책인지 알 수 없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경력 단절 같은 ‘모성 페널티’에 비출산 결심”
지금 대한민국의 저출생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성평등 하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회 전반의 면면이 통합적으로 작용해 저출생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 법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저출생 문제에 대해, 지금과 같이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강도 높은 노동문화를 바꾸지 않는 한, 돈을 준다고 해서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출산 취업여성들에 관한 한 연구는 기혼 취업여성들이 직장인으로서의 인정 기회 박탈, 모성보호제도와 일-생활 균형 정책에 따른 동료들과의 불편한 관계 형성, 업무 몰입과 능력에 대한 의심, 경력 단절 위기와 같은 이른바 ‘모성 페널티’ 때문에 비출산을 결심한다고 보고했다. 제도적인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개별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합리적인 방안이 비출산이라는 것이다.
5월2일 보도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인식 조사 결과, 25~49세 여성과 남성 중 결혼 의향이 없다는 여성 응답 비율은 33.7%로, 남성 응답 비율인 13.3%보다 2배 이상 높았다. 결혼 의향이 없는 이유로 여성은 가사·출산·자녀 양육 등 ‘역할에 대한 부담’(92.6%)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에 비해 남성은 결혼식 비용·신혼집 마련 등 ‘경제적 부담’(88.9%)을 가장 큰 이유로 들었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는 가사노동과 육아 책임을, 남성에게는 경제적 책임을 이분법적으로 지우는 일을 과거 유교 사회에서처럼 계속한다면, 위와 같은 인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과 가정 양립이 가능한 직장문화와 신뢰할 만한 돌봄 제도를 갖추지 않는다면, 직장에서의 모성 페널티는 계속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출생 현상은 이처럼 출산 주체인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전반적인 우리 사회의 구조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는 문제다. 단발성의 현금 지원이나 생식 기능 관련 정책 같은 실효성 없는 일에 예산을 더 이상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관련 정책 수립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여성의 입장을 적극 반영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시각에서 사회를 재구축하려는 장기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