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부재전표》는 택배 배달기사와 배달을 받는 남자의 두 관점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배달기사는 유아들이 이용하는 대형 완구를 전달하며 자신이 아이가 된 것 마냥 들뜨지만 실제 그 아이는 고열을 앓다 며칠 전 이 세상을 떠났다. 주는 자의 설렘과 받는 자의 절망이 묘하게 겹치는 지점에서 독자는 완구의 새로운 의미를 포착한다.
차(car)와 술(alcohol)의 궁합은 차 역시 배달을 가능하게 했다. 차를 끌고 가야 하나 음주운전은 할 수 없을 때 대리기사는 차를 배달한다. 좁은 공간에 더부살이하며 운명을 공유하고 전화번호와 내 차번호, 운전대, 목숨, 주소까지 타인에게 맡긴다. 이는 낯설고 묘하다. 왜일까.
택시를 탈 땐, 내가 초대된다. 구성진 트로트가 나오는 어느 할아버지의 쥬크박스에, 온갖 얄궂은 할로겐 불빛으로 치장한 20대 젊은 기사의 할로윈쇼에, 양당제를 비판하며 대한민국 검찰개혁을 역설하는 뉴스룸에 초대된다.
대리기사는, 내가 초대한다. 내가 세팅한 의자, 내가 셋업한 주행모드, 내가 미리 듣던 음악까지. 대리기사가 자신의 폰을 블루투스에 연결하며 “이것도 인연인데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들을까요?”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기름도 내가 넣었고 세차도 내가 한 차를 운전한다.
그러다보니, 갈등요소가 택시보다 많다. 왜냐면, 택시는 내리면 그뿐인데 대리운전은 신경 쓸 요소가 많다. 예민한 양반은 급브레이크·급발진에 내일 내가 밟을 엔진미션이 걱정 된다.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면 길을 한참 도는데 줄줄이 새는 기름의 감당은 차주 몫이다. 진상이 누가 됐든, 고객이 더 많은 것을 건 상황이므로 갈등이 더 생긴다, 이것이 통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인적인 통찰이다.
그것은 드라이브가 아니라 노동이다. 드라이브는 돌아가도 뷰가 좋은 길을 가고, 연비가 안 좋아도 적당히 엑셀을 밟으며, 쉬고 싶으면 내리면 된다. 그러나 노동은, 최적이라는 한계선을 지켜야 한다. 돌아가지 않아야 하며, 평범하게 운전해야 하고, 도착 전에 내릴 수 없다. 게다가 ‘손님’은 100%의 확률로 술까지 먹은 상황.
“대리기사, 말다툼 뒤 음주운전 신고”
차주와 싸우다 감정이 격해지면 대리기사가 차를 중앙선 혹은 주차장 입구에 대고 내린다. 그리고 음주자가 운전하기를 기다렸다 신고를 한다. 운전을 하는 이는 꼼짝없이 처벌받는다. 긴급피난(형법 22조)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으나 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그렇다면, 대리기사는 처벌할 수 없을까.
대리기사 역시 음주운전으로 처벌된다. 방조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린 탓에 차주는 차를 끌고 가야 했고, 이러한 행위를 직접적으로 유도하였기에 방조가 된다. 수긍이 된다.
술을 ‘마시지’ 않고 ‘쏘거나’ ‘꺾는’ 요즘 세대에서 힐링의 자리는 혐오로 대체됐다. 마음 놓고 아프기도 어려운 시기다. 대리기사가 신고했다면 누구 잘못일까. 직업윤리 없는 대리 기사?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화나게 한 운전자? 실상은 모르지만 저들은 서로를 비난할 것이다.
확실한 건, 개인의 분노는 그들을 둘러싼 구조에 향하지 않고 향할 필요도 없다. 상대방이 나쁘고, 그런 상대방을 거르지 못한 자신을 탓한다. 자신조차 분노의 대상이라 오롯이 발산되지 않는다. 남은 분노 기제는 주체성을 잃고 왜곡되어 엉뚱하게 분출된다. 대리(代理费)자는 나의 일을 하면서도 내가 아니기에 좋은 타깃이 되고, 그렇게 대리가 횡행하는 구조 속에서 사회는 멍들어 간다. 음주운전을 피하기 위한 대리기사에 의해 음주운전을 하는 이 사회의 자화상이다.
음주자 버리고 간 대리기사, 음주운전 방조죄로 처벌된다.
사족: 만약 아파트에 도착한 뒤 고객이 호의로 자신이 주차하겠다며 직접 주차한 경우 어떨까. 고객은 당연히 음주운전으로 처벌받고 대리기사 역시 종범(방조)으로 처벌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