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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진중권 논쟁 어떻게 봐야 하나
정파의 입장만 우선하는 柳…괴물의 언어 토해 내는 陳
“정경심 교수가 검찰 압수수색 전에 자신의 컴퓨터를 가져간 것은 증거 인멸이 아니라 증거 보존이다.” “이건 오픈북 시험이다.” “조국 전 장관 가족을 털 듯이 하면 안 걸릴 사람이 없다.” 그가 제시하는 ‘가설’은 지지자들에게 전해지면 ‘사실’이 된다. 하지만 울타리 밖에서는 궤변이라는 논란이 따를 때도 있었고, 사실에 근거한 반박이 따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간 버스가 손을 들어도 오지 않듯이, 유 이사장의 지나간 말들은 반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면전에서 그 책임을 추궁하자, 그는 “내 독자들이 뭘 하는지 잘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 유 이사장은 종종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우리는 아무도 정확하게 사실을 모른다.” “검찰에서 주장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유 이사장이 보여준 것은 그렇게 회의하고 고뇌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정파의 입장을 우선하는 능수능란한 마키아벨리스트의 모습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창과 방패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심판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 그의 최우선적 관심은 문재인 정부의 위기를 막아주는 데 있었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의 기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검찰 저격수로 나선 이런 유 이사장을 다시 저격하고 나선 것이 진중권 전 교수다. 조국 사태 초기만 해도 침묵했던 그였지만,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는 발언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의 원색적인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참전을 결심한다. 진 전 교수는 그 과정을 “스스로 붕대 감고 자진해서 무덤 속으로 들어간 미라 논객을 극성스러운 문빠 좀비들이 저주의 주문으로 다시 불러냈다”고 표현했다. 그의 페북 폭탄이 연일 화제에 오르는 이유는 그만의 ‘성역 없는 신랄함’에 있다. 그가 비판하는 상대는 전방위적이며, 비판의 표현은 수위를 고려하지 않는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과연 공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인가”라는, 역린을 건드리는 “깊은 회의”까지 발설한다. 한국당도 문재인 정부를 비판해 왔지만, 차마 한국당이 하는 얘기에 박수를 치고 싶지는 않았던 층들이 진 전 교수의 발언에는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동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국 사태로부터 검찰 수사 외압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에게는 진 전 교수의 독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쏟아낸 언어들 또한 진실의 창이 되기에는 너무 과장된 포장이 많았다. 그에게 ‘문빠’들이란 “집단 속 승냥이, 뇌 없이 떼 지어 다니는 좀비들”이었다. 진 전 교수 특유의 조롱과 비하의 어법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성이 내린 판단을 굳이 조롱의 어법으로 표현했을 때, 그것은 감정의 외피를 입고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진 전 교수가 야유하는 ‘문빠’들의 문제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들을 앞에 놓고는 과연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괴물과 싸우다가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을 조심하라던 니체의 잠언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괴물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누구를 지지하느냐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 자체가 괴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 전 교수는 유 이사장과는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극단론이었다. 그는 서초동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싸잡아 ‘조국기부대’라고 폄하하며 조롱한다.혼돈 속, 지식인이 감당해야 할 고뇌의 무게 안 느껴져
유시민과 진중권, 두 사람의 논쟁은 서부 활극 영화를 보는 것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그런데도 논쟁의 뒤끝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막상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 속의 의견이 충돌할 때 우리는 지식인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한 의견의 접근과 공론의 형성을 기대한다. 하지만 유 이사장과 진 전 교수의 논쟁은 분열과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두 사람만 탓할 일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른 상대를 제압하려고만 할 뿐, 서로를 이해시키고 이해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서초동에 촛불을 들고 모인 사람들에게도, 내부 비리들을 어떻게든 감추려는 정권에 성난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진심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두 논객에게 건너편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진심은 일말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단절의 재확인뿐이었다. 한 시절 그래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간다고 믿었던 사람들끼리 적대하는 오늘의 풍경은 분명 슬픈 것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들어선 정권에서도 과거와 같은 논란과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면 이 시대는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떠올려야 마땅하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우리의 역사는 과연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고도 힘든 질문들을 우리는 대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논쟁에서는 이 혼돈의 시대 속에서 지식인이 감당해야 하는 고뇌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2020년 우리 앞에 놓인 상황들이 그렇게 초지일관 단칼에 내려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유시민이나 진중권이나 자기 확신은 넘치고 자기 회의는 없는 공격형 파이터(fighter)들이다. 링 위의 파이터들은 싸우고 관객들은 각자의 편을 응원하는 것이 공론의 장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야 할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공론의 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앞에 많은 숙제가 쌓여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