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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FDA 규정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식품용’ ‘비식품용’ 뒤섞여 재활용돼

매일 들고 마시는 테이크아웃용 일회용 커피 컵이 과거 농약 등 위험물질을 담았던 페트병 원료로 재활용한 거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동안 출처도 알 수 없는 폐페트병들을 재활용해 커피 컵, 도시락 등 여러 식품 용기들을 만들어 온 사실이 최근 밝혀져 파장이 일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물론, 우리 식약처에서도 식품 용기 재활용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놨지만, 대다수의 재활용 처리업체에선 이를 무시하고 섬유 등 비식품용 재활용과 똑같은 공정을 거쳐온 것이다. 이에 대해 식약처와 환경부 모두 강력한 제재는 물론, 제대로된 사태파악도 하지 못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페트병 재활용 처리업체 모습 ⓒ시사저널 최준필
페트병 재활용 처리업체로 들어온 각종 페트병들 ⓒ시사저널 최준필

‘물리적 재생’ 방식으로는 기존 물질 완벽 제거 힘들어

전 세계적으로 폐페트병을 재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이들을 잘게 썰어 플레이크(flake, 조각)로 만든 후 씻어 재활용하는 ‘물리적 재생’ 방식이 있고, 폐페트병들을 완전히 녹이고 정제해 재활용하는 ‘화학적 재생’ 방식이 있다. 국내 식약처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식품 용기, 특히 커피 등 액체를 담는 용기의 경우 화학적 재생을 통해서만 만들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존에 남아있던 물질을 좀 더 확실히 제거해 위생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정을 담당하는 국내 24개여 재활용처리업체 대부분 이 같은 규정을 지키지 않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업체마다 화학적 재생을 할 수 있는 시설 자체가 거의 마련돼 있지 않으며, 식품용·비식품용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물리적 재생’ 절차를 거쳐온 것이다. 
 
‘물리적 재생’을 거친 페트병 원료의 경우, 식품 용기로 재활용하기에 위생적으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중간에 세척 과정이 있지만, 이를 거치더라도 접착제 성분과 끈적한 이물질이 그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세척 과정에서 가성소다(NaOH, 양잿물)를 사용하기도 해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더욱 남아있을 위험이 있다.
그 때문에 FDA에서도 ‘물리적 재생’법은 재활용처리업체의 확실한 책임 약속을 받은 후에만 일부 식품 용기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 커피 등 액체를 담는 용기는 무조건 ‘화학적 재생’만을 거치도록 한다. 다른 나라보다 페트병에 접착제와 잉크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적인 기준보다 오히려 재활용 기준을 더 엄격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게 일부 업계와 환경단체의 일관된 요구였다.
재활용 처리업체로 들어온 페트병들은 잘게 썰려 세척과정을 거친다. ⓒ시사저널 최준필
재활용 처리업체로 들어온 페트병들은 잘게 썰려 세척과정을 거친다. ⓒ시사저널 최준필

식약처, 뒤늦게 사태파악해 실태조사 나섰지만… 

우리 식약처도 일찍이 식품 용기의 경우 ‘화학적 재생’을 통해서만 만들도록 규정해뒀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2013년 11월 식약처 내부 회의록에 따르면, ‘위생적인 문제 때문에 국내 재활용 처리 절차를 통한 페트병 원료는 ’식음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해당 재활용 규정을 만든 식약처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이달 초 대대적인 실태조사에 돌입했다. 5월2일 식약처는 “최근 3년 동안 시중에 유통 중인 페트 기구나 용기 제품 검사 결과, 납 등 문제가 될 만한 성분이 초과 검출된 제품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식약처의 이번 조사에 한계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이번 조사가 재활용된 페트병이 아닌 아예 새로 생산된 신(新)페트병에 맞춰진 항목들로만 구성돼 있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고차 결함을 검사하는데, 신차를 검사할 때 쓰는 항목을 가져온 셈”이라고 비유했다. 또한 재활용 페트병에서 검출될 수 있는 유해 성분이 수백가지인데, 이번 검사는 십수가지 성분만 특정해 이들의 검출 여부만을 조사했다. 따라서 조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유해 성분들이 페트병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매일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고 마시는 재활용 페트병 용기. 그 페트의 원료가 과거 어디서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소비자로선 전혀 알 길이 없다. 식음료 페트병부터 농약 등 위험물질이 담겨 있던 페트병까지, 한 데 섞여 재활용되는 현 상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도 외국처럼 페트병 생산 과정에서부터 식품용과 비식품용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거나, 페트병에 접착제나 잉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해 위생에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줄곧 위생적이지 못한 재활용 공정이 이뤄져왔다는 사실이 뒤늦게나마 밝혀진 지금, 페트병 재활용 관련한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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