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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합의 실패하면 20대 국회서 사실상 무산

이슈가 이슈를 잡아먹는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흔한 일이다. 여야의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여의도에선 전선(戰線)이 끊임없이 변한다. 그 이슈는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때론 새로운 이슈 덕분에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도 한다. 꼭 필요한 논의가 뒷전으로 밀리기도 한다.

선거제도 개혁 이슈가 딱 그렇다.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을 뺀 야 3당은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선거제도 개혁을 예산안 처리와 연계시키며 이슈화에 성공했다.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이 선거제도 논의를 배제한 채 예산안을 처리하자 야합이라며 ‘더불어한국당’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이어진 두 야당 대표의 단식은 원내 5당의 합의까지 이끌어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양당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나왔다. 동시에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도 수십 년간 제기됐다. 늘 정치 개혁을 얘기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와 맞물려 어김없이 실패했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밑 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폭로 정국이 새해 벽두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선거제도 개혁 이슈는 수면 아래로 몸을 숨겼다.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상투적 표현보다 ‘민간인 사찰’ ‘인사개입’ ‘청와대 외압’ 등 휘발성 강한 단어들이 주목을 받았다. 20대 국회는 선거제도 개혁의 불씨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야 3당 의원들이 2018년 12월14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야 3당 의원들이 2018년 12월14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거대 양당과 군소 정당, 이해관계 엇갈려

유력 정치인들은 새해가 되면 신년사를 통해 한 해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할 어젠다를 제시한다. 2019년 신년사 키워드는 크게 엇갈렸다. 민주당과 한국당은 ‘경제’를 강조한 반면,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선거제 개혁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낡은 정치체제, 기득권 양당의 정쟁이 계속되는 승자 독식 선거제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시작으로 민생과 경제를 살리겠다”고 주장했다. 정동영 평화당 대표는 “국회 개혁과 민생정치의 출발선인 선거제도 개혁 관철을 위해 모든 당력을 집중하겠다”며 “국회 개혁과 민생 개혁을 주도하겠다”고 말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변화를 바라는 평범한 국민들의 한 표가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다”고 강조했다.

반면 민주당과 한국당은 선거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미 선거제 개편안 1월 처리에 합의해 놓고도 현 상태 유지를 내심 바라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앞서 여야 5당은 2018년 12월15일 선거제도 개편 방향에 합의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관련 법안은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는 조항을 통해 구체적인 시간표에도 합의했다. 이를 위해 선거제 개혁을 담당하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활동 시한도 연장키로 했다. 선거제 개혁 법안 통과 이후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 논의 착수’라는 더 큰 차원의 논의에도 합의했다.

합의문 도출은 한국당의 입장 선회가 작용했다. 한국당은 연동형 비례제와 그 전제조건처럼 여겨지는 의원 정수 확대에 반대해 왔다. 그러나 선거제 개혁을 외면한다는 책임이 한국당에 쏠릴 것이란 점을 우려했다. 대신 지역구 의원 선출 방식을 놓고 도농복합형이란 대안을 삽입해 선거제 개혁에 적극 임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순탄할 것이라고 보는 정치권 인사는 거의 없었다. 원내 5당의 합의 직후에도 합의 문구를 두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사활을 건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적극적인 해석을 내놓은 반면, 연동형에 부정적인 한국당은 “검토에 합의한 것”이라며 난항을 예고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의원 정수 확대에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같은 당 윤영석 수석부대변인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기로 최종 합의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여기에 민주당은 연동형 도입에는 찬성한다면서도 “100% 도입은 곤란하다”(이해찬 대표)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이 한국 실정에 맞는 ‘부분 연동형’ 도입을 시사하면서 선거제 개편 논의는 더욱 고차방정식으로 이동한 상태다. 

선거제도를 바꾸는 데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데드라인은 올해 상반기다. 그것도 넉넉히 계산한 결과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총선 선거구 확정 시한은 4월15일이다. 그 전에 선거제도를 확정해야 한다. 이번에도 법정시한을 넘길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 상반기까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올해 하반기가 되면 각 정당이 사실상 총선 모드에 돌입해 룰 변경은 사실상 어렵다는 얘기다.

원내 5당이 합의한 1월 처리 시한은 사실상 지키기 어려운 약속과도 같았다. 여야는 1월20일까지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 구체적인 합의안을 도출하기로 했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2018년 마지막 정개특위 1소위원회는 20여 분 만에 정회를 겪기도 했다. 정개특위의 한 관계자는 “처리시한을 1월로 정하긴 했지만 지금은 합의문에 대한 해석을 놓고 싸우는 공전 상태”라며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12월 임시국회가 1월15일까지 예정돼 있지만 7가지 쟁점 중 단 하나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이후 합의안을 처리하려면 여야가 임시국회를 소집해야 하지만 이마저 불투명하다. 지역구 의원들이 1월에 의정보고회 등을 진행하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불확실해 보인다. 특히 2월 예정된 한국당 전당대회까진 현 비대위 체제가 선거제를 바꾸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2018년 12월20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선거제도 개혁 토론회에서 의원들이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12월20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선거제도 개혁 토론회에서 의원들이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데드라인 임박 ‘각론 합의’ 전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각론을 하나씩 살펴보면 합의는 더욱 요원하다. 의원 정수 조정,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비율, 개헌 논의 여부 등을 놓고 여야 간 견해차가 커 선거제 개혁 논의가 속도를 내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만 해도 ‘적극 검토한다’는 수준이어서 정개특위에서 어떤 형태로든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가장 큰 장벽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여부다. 기존 선거제의 틀 자체를 바꾸는 만큼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민주당이 말한 한국형 비례대표제(부분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군소 3당의 요구와 다소 엇갈린다. 한국당은 아예 반대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비례대표 비율 확대, 이에 따른 의원 정수 문제도 걸림돌이다. 군소 3당은 솔직히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수를 확대하자고 하고 있지만, 거대 양당은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든, 정의당이 희망하는 전국 단위 비례대표제든 현행 의원 구성 체계로는 불가능하다. 지역구 의석을 축소하든지 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 이 가운데 국회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구 의원들이 선뜻 지역구 의석을 줄이는 데 찬성할 리 만무하다. 반면 의원 정수 확대에 대해선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다. 석패율제도 마찬가지다. 아깝게 낙선한 지역구 후보자를 구제하는 제도 특성상 큰 정당 소속의 인지도 높은 중진 정치인에게 유리한 제도다. 한국당 일각에서 주장하는 도농복합형 선거구제(도시는 중대선거구제, 농촌은 소선거구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개헌 문제도 변수다. 선거제 개혁 관련 법안 통과 즉시 논의에 착수키로 한 전제가 붙었지만, 구체적 선거제도 개편안에 부대조건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과 같은 단서가 붙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민주당이 동의하기 어려워 선거제 개혁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선거제 개혁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은 대부분 일치한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소선거구제에서 비롯된 지역주의는 여전히 한국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 그동안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정당들이 거대 양당을 형성해 왔다. 수도권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본선보다 예선이 더 치열한 상황에서 승자 독식 구조는 지역주의를 고착시켰다. 

권순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2019년은 선거제도의 선진화를 이룰 수 있는 적기”라며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과 사회 변화에 맞게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대하고 유권자의 의사가 선거 결과에 충실히 반영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앞서 선관위는 20대 총선을 앞둔 2015년 2월 현행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혼합형 선거구제의 등가성 왜곡을 개선하기 위해 ‘전국 6개 권역별 연동형 비례제’를 제안했다. 지역구 의원을 당시 246명에서 200명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는 54명에서 1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당시 선거구제 협상 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과 정의당은 연동형 비례제에 찬성했지만, 과반 의석을 가진 새누리당(현 한국당)의 반대로 결국 도입이 무산됐다. 심지어 여야는 선관위 제안에 역행하는 협상 결과를 내놨다. 현행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혼합형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지역구 의원을 253명으로 늘리고 비례대표는 47명으로 줄인 것이다.

현행 선거제도에 대한 국민 불만도 충분히 고조돼 있다. 한국리서치가 KBS 의뢰로 2018년 12월28~2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3.4%는 현행 국회의원 선출 방식이 국민의 뜻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잘 반영한다’는 응답(23.4%)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지지 정당이나 이념 성향과는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또 국회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국회의원 선출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국민 3명 중 2명(66.3%)은 ‘동의한다’고 답했다. 국민 다수가 현재 국회의원 선출 방식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고, 선거제 개편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치 개혁 장애물 ‘정치 불신’

정작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선거제 개혁 논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들이 특정 선거제를 선호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여부에 대해선 찬성(46.4%)과 반대(44.1%)가 오차범위(2.3%포인트) 내에서 팽팽히 맞붙었다. 실제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응답자는 79.9%에 달했지만, 이 제도의 내용까지 알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8%에 불과했다.

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국회 의석수 조정 문제에 대해선 예상대로 반감이 컸다. 응답자의 79.0%가 ‘국회의원 의석수가 늘어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군소 정당의 주장대로 ‘보좌진 축소 등의 방식으로 예산을 줄이거나 유지할 수 있다면, 의석수 증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추가로 물었지만 역시나 반대 의견이 78.8%에 달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근 국회 정개특위 간담회에서 “정부 형태를 바꾸는 방안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선거제 개편의 선택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기본으로 하되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의원 수를 350~360명으로 소폭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국민적 반감을 감안해 국민들에게 선거제를 설득하는 한편 국회를 압박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1월10일 정치개혁공동행동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압박을 이어갈 예정이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을 차일피일 미루고 당리당략을 좇는 정치권과 국회 행태를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며 “2019년 3월까지 반드시 선거제도 개혁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국 주권자들의 의지와 힘을 다시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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