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승부사’ 김정은의 다음 노림수
南·中 지렛대 활용 美와 핵 담판 시도
2019년처럼 북한 지도자의 신년사가 주목받은 때가 있었을까. 조선노동당을 대표하는 최고지도자의 새해 첫 공식 연설이라는 점에서 북한 신년사는 서구 사회의 연두교서(Annual Message) 성격이 짙다. 김일성 주석은 정권 수립 이전인 1946년 ‘신년을 맞이하면서 전국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신년사를 매해 발표했다. 이러한 통치 행위는 1994년 사망 전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이뤄졌다. 그런 점에서 북한 신년사는 취약한 권력구조를 미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통치 수단이다. 주민들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도 ‘승리하자’ ‘쟁취하자’ ‘점령하자’ 등 상당히 전투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신년사엔 전통적으로 북한 대외정책의 밑그림이 담긴다. 그런 점에서 2019년 신년사는 어느 때보다 의미가 있다. 2018년 한반도 해빙 무드의 출발점 역시 신년사였다. 2018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 교류를 언급하면서 평창동계올림픽에 대규모 응원단을 보내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동계올림픽 폐막 이후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통령 특사단을 보내, 4월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6월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것도 2018년 신년사에서 비롯됐다.
2019년 신년사가 중요한 이유는 한반도 비핵화에 있어 올해가 분기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018년 초반까지만 해도 북·미는 긴장감을 최고로 끌어올리며 적대관계를 이어 나갔다. 이 때문에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들은 세계의 화약고로 주저 없이 한반도를 지목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던 두 나라 정상이 만나, 악수할 줄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2018년 6월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 달리 비핵화 협상은 장기전에 돌입한 모습이다. 현재로선 양측 모두 평행선을 이어 가고 있다.
시사저널은 2018년 5월 특집기사에서 인상 전문가 주선희 원광디지털대 교수의 말을 빌려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살이 두툼하며 피부가 두꺼운데 이는 참을성이 강하고 시련이 닥쳐도 잘 이겨내는 타입”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반대로 처진 입꼬리와 좁은 인중은 성급한 성격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의 인상에 위기와 기회가 모두 있다는 것이다. 2018년과 마찬가지로 2019년 역시 두 가지 상황은 모두 상존하고 있다.
■ 종전 이후 서울서 열릴 첫 남북 정상회담
2018년부터 북한의 비핵화 전략은 남한 정부와의 교류·협력을 통해 미국 및 국제사회와 화해를 이뤄내겠다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최종 담판은 미국과 짓되, 필요할 경우 남한 정부와 우방인 중국의 도움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새해 한반도 비핵화에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의 동력 역할을 해 왔다. 4월 판문점 선언 이후 북·미 간 대화가 답보 상태를 보이자, 약식이지만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두 정상이 만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9월 평양 방문은 하반기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사전 회담 성격도 있었다.
9월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가진 공동언론발표에서 김 위원장은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약속하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가까운 시일’이라는 시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서울 방문을 요청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 여기서 가까운 시일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올해(2018년) 안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답방은 한반도 비핵화에 있어 중요한 변화다. 문재인 정부보다 앞서 정상회담을 가진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못한 일이 바로 북한 최고지도자의 남한 답방이다. 역대 정부 때마다 남북 정상회담은 판문점을 제외하곤 모두 평양에서 열렸다. 남측 지역에서 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2018년 4월27일 김 위원장이 판문점 우리 측 지역인 ‘평화의집’을 찾은 것이 유일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12월2일 뉴질랜드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의 답방이 이뤄진다면 그 자체로 세계에 보내는 평화 메시지, 비핵화에 대한 의지,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의지 등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관련해 “연내(2018년) 답방을 할지 여부는 아직 알 수는 없다”면서도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자체가 큰 의미가 있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초 우리 정부는 2018년 11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연말께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정상이 다시 만나 종전선언을 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다. 문 대통령이 2018년 9월 평양에서 연내 서울 답방을 희망한 것엔 이러한 복안이 숨겨져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9월말까지만 해도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남북 정상회담이 어떠한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랬기에 ‘선(先) 북·미, 후(後) 남북대화’라는 정책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북·미 대화 중단되고 남북대화만 진전
변화가 감지된 것은 2018년 10월말, 11월초로 예상됐던 북·미 정상회담이 무기한 연기되면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대표되는 양측 실무자 간 협상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의 2018년 개최는 물 건너갔다.
이때부터 청와대 내에선 답답한 한반도 비핵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또다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미 동맹을 훼손하지 않는 차원에서 미국 쪽 사전 동의도 구했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문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 대해 아주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김 위원장을 좋아한다. 그런 만큼 김 위원장과 함께 남은 합의를 다 마저 이행하기를 바라고, 또 김 위원장이 바라는 바를 ‘자기가 이뤄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외교가에선 “2018년 12월 중순 경 김정은 위원장이 답방 형식을 빌려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해 11월26일 “2차 북·미 회담 전이 좋을지 후가 좋을지, 어떤 것이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데 더 효과적일지 여러 가지 생각과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답방 또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논의 중”이라고 말해 가능성을 내비쳤다.
당초 양측이 예상한 답방 시기는 지난해 12월15일이었다. 12월16일은 김 위원장의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일이며 24일은 김 위원장의 할머니인 ‘김정숙 탄생일’, 27일은 헌법절이다. 30일은 김 위원장이 최고사령관에 오른 날이다. 이 때문에 대북 정보라인에선 “12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북한 내 대형 이벤트가 많기 때문에 연내 답방은 어려워진다”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청와대에 보고했다. 12월 중순 한 대북소식통은 “북한은 국가적 행사에 정부 내 모든 기구가 참여하는 소위 ‘멀티플레이’가 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12월에 회담을 열어야 했다면 초순경이 낫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청와대의 구상은 경호, 의전상의 이유로 북측이 난색을 표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남한 내 반발’이다. 문 대통령 역시 기자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해 북한에서 가장 신경을 쓸 부분이 경호나 안전의 문제일 것 같다”며 “그 부분들은 우리가 철저하게 보장을 해야 한다. 혹시 국민들의 불편이 초래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국민들께서 조금 양해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측 입장에서 ‘북·미 간 대화가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이 또다시 만나봤자 얻을 게 별로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측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군부보다 오히려 외교부 라인 내에 김 위원장의 답방에 부정적인 기류 많았다”면서 “일부 인사들은 남한 정부가 미국 쪽에 북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전달해 주길 바랐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것에 대해 상당히 서운해했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답방을 위해 청와대는 서울 시내 한 유명 특급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놓기도 했다.
남북, 2018년 말 서울 답방 놓고 막판까지 협상
이 와중에도 청와대의 연내 답방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제안한 시점은 12월30일, 31일이었다. 30일은 김 위원장이 최고사령관에 오른 날이고 31일은 신년사가 발표되기 직전일이기 때문에 정상회담과 같은 굵직한 행사가 열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측이 ‘연내 답방’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실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시사저널은 12월24일 온라인판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으로 12월30일부터 31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남한을 공식 방문할 것이 유력시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시사저널은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빌려 관련 사실을 보도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권혁기 청와대 춘추관장 명의로 출입기자들에게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 “김정은 위원장 답방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대외적으로 부인하는 과정에서도 통일·외교·안보라인에선 여전히 비밀리에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추진했다. 보도가 나간 뒤 청와대 관계자는 오히려 시사저널에 “남한 내 갈등을 우려해 양측은 육로가 아닌 항공기를 이용해 서울을 찾는 방안을 놓고 협의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당시 실무선에선 김 위원장이 전용기를 타고 서울공항에 내려 여기서 헬기로 갈아타고 서울로 들어오는 것과 헬기를 타고 바로 서울에 진입하는 것을 두고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헬기를 이용할 경우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사용하는 대형 헬기 시코르스키 S-92를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됐다. 현재 국내에 3대가 있는 이 헬기는 공군 15전투비행단 3호전투대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 위원장 일행은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청와대 안가를 숙소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또 국회 방문도 고려했지만 자유한국당 등 야당의 반대를 감안, 적극적으로 추진하진 않았다. 1박2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방문해 두 정상이 헬기를 타고 한라산에 오르는 이벤트도 구상됐다.
연말 서울 답방은 북측이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대신 김 위원장의 친서가 전달됐다. 청와대는 북측이 김 위원장이 보낸 친서를 답방 예정일이었던 12월30일 언론에 공개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김 위원장은 두 정상이 평양에서 합의한 대로 올해 서울 방문이 실현되기를 고대했으나 이뤄지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며 “김 위원장은 앞으로 상황을 주시하면서 서울을 방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여권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동분서주한 것에 대해 김 위원장이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다”면서 “정확한 이유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30일 답방 대신 친서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2019년 초 서울 답방이 실현될진 미지수다. 만약 추진된다면 전제조건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장기전에 돌입하는 경우다. 양 정상이 만나 북한과 미국의 조건 없는 회담을 촉구하는 모양새가 현재로선 유력하다. 변수는 미국의 반대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 있어 남한 정부의 단독 행동을 문제 삼을 경우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로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는 2018년 12월30일 북측 친서를 공개하면서 김 위원장이 2019년에도 자주 만나자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