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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0화 - 국민교육헌장 선포 50년

오는 12월 5일은 국민교육헌장이 세상에 나온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시작되는 이 헌장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교실에 남아야 했고, 잘 나가다가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쯤에서 헤매면 으레 꿀밤이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씁쓸한 추억이, 또 다른 이에게는 악몽이었을 이 헌장은 일제의 교육칙어(教育勅語)를 본뜬 것이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교육칙어란 1890년 메이지 일왕이 신민(臣民)들에게 분부한 12가지 기본 규범을 말한다. 칙어는 유교적 덕목과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일제 교육의 최고 이념이었다. 칙어 제정 바로 전해에는 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은 일본국을 현인신(現人神)이 통치하는 '천황제 국가'로 규정했다. 일본을 다스리는 정신체계가 교육칙어라면 제국헌법은 그 정치체계였던 것이다. 이 둘은 메이지 유신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한 축을 이뤘다.


군국주의 침략을 이끈 메이지 유신의 '아이콘', 헌법과 칙어

어쩌면 메이지 유신은 영국 런던대학 캠퍼스에서 그 싹이 텄다고 해도 그리 지나치진 않다. 이곳에는 1863년 "해외 도항을 금지한다"는 막부의 명령을 어기고 유학 온 일본 청년 20여 명을 칭송하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들은 귀국 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됐다. 당초 유신 주역들은 영국을 '근대화 모델'로 삼았지만 점차 독일의 군제와 법제도에 주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본과 독일은 두 나라 모두 황제국을 표방했고, 수십개의 소국이 통일을 이뤘으며, 뒤늦게 근대를 경험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UCL 런던대학과 교정 내 옛 일본 유학생 기념비. 오른쪽은 조슈번 출신 유학생 5인방. 윗 줄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다. ⓒ 이원혁 제공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헌법 제정이었다. 1876년 메이지 일왕의 명령에 따라 훗날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제헌 작업을 주도했다. 이토는 두 차례 독일로 건너가 국가 건설의 기초와 '군주 중심' 헌법체계를 배웠다. 그러다 보니 제국헌법은 국민이 아닌 왕에게 '주권'을 주었고, 육·해군 통수권, 중의원과 내각 해산권 등 막강한 권력을 쥐여 줬다. 일본제국은 무늬만 입헌군주제였지 실상은 전제군주정에 가까운 통치체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헌법 작업 중에 '절도 사건'이 생긴 일이다. 초안을 만든 가네코 겐타로가 쓴 《헌법제정, 구미인의 평론》에 그 내용이 적혀있다. 1887년 요코하마의 아즈마야 여관에서 그와 이토 히로부미 등 4명이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8월 어느 날 밤, 여관에 도둑이 들어 초안이 든 문서 가방을 훔쳐 달아났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복사기가 있을 리 없고 수기로 작성하던 터라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한바탕 '헌법 소동'이 벌어졌는데, 운좋게 주변 염전에서 가방이 발견됐다. 그 후 외부와 차단된 여관 밀실에서 작업을 계속해 제국헌법이 예정대로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즈마야 여관 자리에 세워진 제국헌법 기념비와 화재로 소실되기 전 여관 모습 ⓒ 이원혁 제공

 

마침내 1889년 2월 11일 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근대 일본'이 시작되는 국가적 경사를 맞은 이 날, 나라 전체가 축하 행사로 들뜬 분위기였다. 의례용 양복이나 모자, 구두 주문이 쇄도했고 일장기는 동이 날 정도였다. 제등업, 숙박업, 마차영업, 요리집, 도시락점 상인들이 '헌법 특수'로 큰 재미를 봤다. 한데 행사 자료를 살피다가 필자는 '만세삼창'의 유래를 적은 글에 눈길이 갔다.《일본의 세시전승》 책에는 만세 구호가 헌법 공포일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원래 헌법 공포식에서는 호우가(봉하 奉賀)라고 외치기로 했는데 이를 연속 발음하면 바보란 뜻으로 들려 다른 구호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쿄제국대 와다가키 겐조 교수가 고안한 '반자이(만세)'라는 구호와 동작으로 결정됐다. 이윽고 아오야마 관병장에 일왕이 모습을 나타내자 훗날 도쿄대 총장이 된 도야마 마사카즈가 '천황폐하만세'를 크게 선창했고 참석자들도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따라 외쳤다. 또 삼창은 영국에서 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후레이(hurray)'를 세 번 외친 것을 본떴고, 그 후 관습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만세삼창의 기원은 1896년 독립신문에 나온 "학교 운동회에서 대군주 폐하께 만세를 불렀다"란 기록 외에도 고종 황제의 등극 예식, '야허'란 말, 또는 '산호만세'에서 비롯됐다는 등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아직 정설이 없는 셈이다. 3·1 운동 100주년을 앞둔 지금,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시급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제국헌법은 행사 구호 하나 만드는 데에도 진통을 겪을 만큼 신중에 신중을 더해 완성되었다. 미국 페리함대에 겁을 먹고 개항한지 36년, 이제 근대국가로 거듭났다는 감격과 자신감이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제국헌법 공포식 그림. 오른쪽은 만세란 깃발이 보이는 미국 신문의 삽화. 해외에선 '헌법 내용도 모르고 열광하는 일본인들이 우스꽝스럽다'란 반응도 있었다 ⓒ 이원혁 제공


하지만 이와 같은 '욱일승천'의 기세가 되레 침략전쟁으로 이어진 게 문제였다. 일본은 헌법 제정 5년 뒤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1904년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두 전쟁의 승리로 타이완을 식민지로 얻었고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런 '성과'를 천황제의 승리로 전파했고 덩달아 헌법과 칙어의 권위도 높아졌다. 그 즈음 권력 내부에서 이 둘을 식민지에도 적용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참만에 "헌법은 식민지 실정에 맞지않는다"란 결론이 내려졌고, 대신 일왕이 직접 임명하는 식민지 총독에게 법 제정의 전권을 주었다. 반면 교육칙어는 천황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 타이완과 조선에 그대로 도입되었다.

이렇듯 교육칙어와 제국헌법의 궤적를 살피다보면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국민교육헌장과 유신헌법이 그것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 선포 기념식에서 "이 헌장은 유신의 과업을 위해 국민들이 가져야 할 기본정신이다" 라며 국민교육헌장이 유신헌법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념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묘하게도 일본 제국헌법과 그 정신 체계인 칙어의 사례와 너무나 닮은 꼴이었다.


전후 한반도와 일본에서 다시금 부활한 군국주의의 '쌍두마차', 헌법과 칙어

박 전대통령은 경북 문경에서 소학교 교사를 지냈으니 누구보다 교육칙어를 잘 알고 있었을 게다. 당시 제복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찬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일왕을 위해 한 목숨 바치라"는 칙어를 외우도록 시켰고, 또 아침마다 칙어 등사본을 '모신' 봉안전에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더구나 일본군 장교로도 복무한 그는 군인용 교육칙어인 '군인칙유'를 암송하며 황군 정신을 다졌을 터다. 이런 그의 이력 탓에 국민교육헌장이 칙어의 '베끼기'라고 더욱 비판받기도 한다.

이와 같이 패전 30년 후 칙어는 옛 식민지 조선에서 헌장이란 이름으로 부활했고, 이 헌장은 유신헌법과 짝을 이뤄 한 권력자를 떠받드는 도구로 쓰였다. 또 다시 30여 년이 흐른 지금, 칙어를 재생시킨 아베 수상은 '전쟁가능국' 일본을 위한 헌법개정에 목을 매고 있다. 해묵은 역사에서 이 둘을 끄집어 내어 군국주의 회귀의 '단짝'으로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교훈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국가가 강압적으로 국민을 가르치려 들던 헌장과 칙어의 '야만'을 항쟁의 역사로 극복한 우리는 경제성장 못지않은 눈부신 '의식 민주화'를 이뤄냈다. 이제는 그만큼 성숙된 의식 수준에 걸맞는 교육 대안을 모색할 때다.

마침 작은 시골 학교인 경남 거창고의 '별난 10계명' 얘기가 솔깃하다. 이 학교는 직업을 고를 때 '월급이 적은 곳' '승진 기회가 전혀 없는 곳'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 하는 곳' 등을 택하도록 학생들을 가르친다. 자신 뿐 아니라 남에게도 유익한 삶을 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른 학교들도 시대 흐름에 맞게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는 교훈이나 급훈을 많이 만드는 모양이다. 거창고 같이 '거창하지 않게' 인성을 가르치다 보면 나라 사랑도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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