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마오쩌둥의 성공과 실패(4)
1893년생인 마오쩌둥(毛澤東)은 79세가 된 1972년 1월18일 본격적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63세 때인 1956년만 해도 장강(長江·양쯔강의 정식 명칭) 중류에서 1시간45분씩 수영을 즐겨 주위를 놀라게 한 마오쩌둥이지만, 만년에는 운동부족으로 혈압이 180~100을 오르내리고, 천식에 다리 부종도 앓았다. 1월18일 마오는 돌연 혼수상태에 빠졌다. 2월 닉슨과 세기의 회담을 앞두고 있었지만 건강은 그가 더 이상 지상에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오는 건강 때문에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과 회담할 때 “복잡한 국제정세는 (저우언라이를 가리키며) 저 사람하고 논의하고, 나하고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토론하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 주목 받은 덩샤오핑의 마오 평가
여러 차례 악화와 완화의 고비를 겪다가 1976년 9월2일 마오는 세 번째 혼수상태에 빠졌고, 9월9일 새벽 중국공산당은 공식 사망을 선포했다. 마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농담은 “책임이 너무 무거울 때는 죽으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지”라는 것이었다. 1966년부터 시작돼 수많은 인민들과 고위층 지도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오는 결국 1976년 9월9일 그 책임을 일단 내려놓았다.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고향 후난성 샹탄(湘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그의 유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공을 기려 천안문광장 한복판에 기념관을 짓고 그의 유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사망 직후 그의 몸에는 20리터의 포름알데히드가 주사됐다. 천안문 한가운데에는 마오의 초상화가 걸리고, 방부 처리된 그의 유체는 마오쩌둥 기념관 지하에 보관됐다. 그의 유체는 현재도 하루에 한 차례씩 지상으로 올라와 인민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마오가 죽자 그의 권력은 일단 화궈펑(華國鋒)이라는 사람 좋은 당 지도자에게 건너갔다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거쳐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넘어갔다. 덩샤오핑이 마오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세계적인 관심사가 됐다.
마오 사망 후 4년이 흐른 1980년 8월21일 새로운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은 인민대회당 118호실에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와 마주 앉았다. 중국공산당 지도자가 서방 저널리스트와 회견을 하는 것은 마오쩌둥이 1936년 옌안(延安)으로 찾아온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Edgar Snow)와 회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노는 마오와 회견한 내용을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이라는 책으로 써서 전 세계에 중국공산당과 홍군, 마오쩌둥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알렸다. 스노와 마오의 회견은 중국의 근대사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한 쑹(宋)씨 세 자매 가운데 중국공산당에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던 둘째 쑹칭링(宋慶齡)의 소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쑹칭링은 중국의 2300년 왕조시대를 종결시킨 혁명가 쑨원(孫文)의 부인으로, 현재 베이징(北京) 서쪽에는 ‘쑹칭링 공원’이라는 넓은 면적의 공원 이름에 남아 있다. 쑹씨 세 자매의 막내 쑹메이링(宋美齡)은 국민당 최고지도자로 중국공산당 홍군과의 내전에서 패해 대만 섬으로 피신한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이 됐다.
덩샤오핑이 이탈리아 기자 팔라치와 회견을 한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대통령으로 저널리스트 출신의 사회주의자 알레산드로 페르티니(Alessandro Pertini)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페르티니 대통령은 친구의 딸인 팔라치가 덩샤오핑과 인터뷰할 수 있도록 직접 중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대사는 중국 외교부에 팔라치의 덩샤오핑 인터뷰를 대신 신청했다. 물론 팔라치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뷰 전문 저널리스트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팔라치가 덩샤오핑에게 처음 한 말은 “내일이 생일이신데 생일 축하한다”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내 생일이 내일이냐. 나는 그동안 생일을 잊고 살아왔다”고 답했다. 덩샤오핑은 이어서 “그럼 내가 76세가 되는데, 76세면 이미 하류에 이른 강물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팔라치는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76세면 늙은 나이라고 했다면 뺨을 맞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팔라치가 덩샤오핑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인민대회당으로 들어오기 전 천안문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봤는데 그 초상화는 영원히 걸어둘 것이냐”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어 있는 가운데, 팔라치가 던진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해 덩샤오핑은 이렇게 답했다.
“영원히 걸어둘 것이다. 과거에는 마오 주석의 초상화는 여기저기 도처에 걸려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마오 주석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고, 엄숙해 보이지도 않는다. 마오 주석은 일정 기간 동안 착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마오 주석이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한 창시자임은 틀림없다. 그의 공과를 말하자면 착오는 2차적인 것이고, 그가 중국 인민들을 위해 한 일은 결코 말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중국 인민들의 감정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마오 주석을 우리 당과 국가의 창시자로 영원히 기념할 수밖에 없다.”
마오 업적을 더 강조한 중국공산당
중국에서 마오의 사후 격하운동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팔라치의 독점 인터뷰라고 전 세계에 소개된 이 회견에서 덩샤오핑이 한 말은 독단적 판단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이 팔라치와 회견을 하기 두 달 전인 1981년 6월27일 제11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를 열어 ‘건국 이래 당에 관한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 ‘결의’의 핵심적인 부분이 마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였고, 당시 당의 결의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모든 경제 건설 사업을 중단하고 진행한) 문화대혁명 10년 기간에 한 착오의 책임은 당의 중앙 집단지도체제에 있고, 마오쩌둥 동지도 주요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착오를 마오쩌둥 개인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마오쩌둥 동지는 문화대혁명에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의 일생을 두고 보건대 그의 중국 혁명에 대한 공적이 그의 과실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공적이 1차적인 것이며, 착오는 2차적인 것이다.”
이제 와서 덩샤오핑이 팔라치와 ‘단독 인터뷰’를 한 사실을 되돌아보면 “덩샤오핑과 중국공산당이 팔라치를 이용 또는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공산당이 덩샤오핑과 팔라치의 회견을 통해 “마오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크다”라고 한 당의 공식 평가를 전 세계에 알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