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반도체 칩의 절반 생산…BT 등 응용과학부터 전기차 등 미래형 기술 연구
독일 드레스덴은 구(舊) 동독의 핵심도시 중 하나다. 무엇보다 도시가 갖고 있는 콘텐츠가 많다. 역사적으로 드레스덴은 작센왕국의 수도다. 현재도 작센주(州)의 주도다. 이 때문에 도시 내 작센왕국 시절 지어진 건축물이 많다. 체코·폴란드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동독 시절부터 다른 곳에 비해 경제 사정이 좋았다. 2차 세계대전 막판 연합군의 대공습으로 도시의 90%가량이 파괴된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렇다고 여느 서독 도시처럼 부유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동독 도시보다 약간 더 잘산 것뿐이다. 도시 상징물인 성모교회(Frauenkirche)가 이런 사정을 말해 준다. 이 건축물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종전 이후 재건에 나서야 했지만 사정이 넉넉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시 중앙에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이 건축물이 복원된 것은 2005년. 교회 복원에는 도시를 처참하게 만든 미국·영국 등 20여 개 나라가 참여했다. 드레스덴 공습에 나선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의 아들 앨런 스미스가 만든 십자가가 교회 지붕 꼭대기에 달렸다. 1999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귄터 블로벨(Günter Blobel)은 소년 시절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을 직접 목격했다면서 상금 전액을 교회 재건에 내놓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성모교회는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변신했다. 외벽 건물 중간중간에 있는 검은색 벽돌은 폭격 전 교회를 짓는 데 쓰였던 것들이다. 폭격의 참상을 그대로 말해 준다. 성모교회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도 대대적인 재건에 들어갔다.
2014년 3월 독일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 등을 골자로 한 ‘드레스덴 선언’을 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당시 우리 정부는 드레스덴의 변화를 북한 경제 번영의 롤모델로 삼았다.
오늘날 드레스덴은 폐허의 도시에서 번영의 도시로 바뀌었다. 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드레스덴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일에 역량을 쏟아 부었다. 현재 이 도시에서 주목받는 산업은 반도체·신소재 등 고부가가치 IT(정보기술)산업이다. 나노기술, 소재 연구 분야에서 드레스덴은 독일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유럽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칩의 절반이 드레스덴에서 생산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대공습 도시 90% 파괴
독일에서 드레스덴은 ‘실리콘 삭소니(Silicon Saxony)’로 불린다. 세계 IT산업의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가 스탠퍼드대·UC버클리대라는 걸출한 교육기관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것처럼 독일 정부도 드레스덴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교육기관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현재 드레스덴에는 11개 대학과 전문연구기관이 포진해 있다. 재학생 수만 4만5000여 명. 그중 대표적인 곳은 2012년부터 독일 최우수 대학 랭킹 톱10에 선정되고 있는 드레스덴 공대다. 드레스덴 공대는 BT(바이오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드레스덴 어드밴스드 일렉트로닉스와 드레스덴 재생치료센터, 프라운호퍼, 라이프니츠, 막스플랑크, 헬름홀츠 연구소도 드레스덴 기업들과 협업 시스템을 구축했다.
드레스덴 중앙역 바로 옆에 위치한 드레스덴 기술경제대(Hochschule Für Technik und Wirtschaft Dresden)는 응용과학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드레스덴 공대가 기초과학의 산실이라면, 이 대학은 응용과학 분야에서 유명하다. 학부는 총 8개며, 교수 등 교원은 170여 명이다. 우리나라에선 부산대와 협업을 맺고 있다. 이 대학은 철저하게 주변에 위치한 기업들과 협력한다. 기술개발의 목표는 상용화다. 그 뿌리는 상당히 깊다. 동독 시절에 이곳에선 철도 등 교통기술 개발과 관련한 연구가 진행됐다. 건물 입구에 독일 철도기관 엔지니어이자 이 대학 교수로 활동했던 요한 안드레아스 슈베르트의 흉상이 있다. 그 맞은편엔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 7월5일 단과대인 응용과학대(Dre-sden University of Applied Sciences) 내 인더스트리 엔지니어링 랩을 방문했다. 현재 이 랩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분야는 ‘스마트 팩토리’(지능형 공장)다. 이 역시 독일 정부의 인더스트리 4.0 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정은 간단하다. 로봇만으로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과정이다. 부품부터 완제품 운송까지 모두를 로봇이 책임진다. 이 랩은 일본 미쓰비시, 스웨덴 ABB, 독일 지멘스 등과 함께 연구를 진행 중이다. ABB가 만든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관절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로봇이 스마트폰 기판을 뒤집어 뒷면까지 공정을 처리하는데 거침이 없다. 독일 지멘스와는 2016년부터 공동연구를 진행해 IoT(사물인터넷) 분야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확보했다.
동·서독의 경제력 격차는 한때 독일 경제의 골칫거리였다. 통일 이후 서독으로 동독 주민들이 밀려들면서 막대한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구 동독 지역 내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는 그만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본격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드레스덴만 해도 인구는 60만 명에 불과하지만 도시의 거의 대부분이 새롭게 탄생했다. 토대가 마련되지 않아 고민하던 게 오히려 기회가 됐다. 확충된 인프라에 기업과 대학이 참여하고 인근 폴란드·체코의 값싼 노동력이 더해지면서 드레스덴은 이제 ‘동부의 뮌헨’으로 불린다. 지금까지 독일의 IT기술은 서부 뮌헨이 주도해 왔다. 이제 독일 산업계는 동부 작센주를 주목한다.
‘동부의 뮌헨’ 불리며 신기술 기업 속속 입주
앞서 설명한 대로 교통기술은 작센주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독일 내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작센왕국 시절 만들어졌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교통박물관에 가보면 BMW 초기 모델들이 전시돼 있다. 폭스바겐의 전기차 공장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현재 이곳에선 골프(Golf)의 전기차 모델인 e-골프가 생산되고 있다.
원래 이 공장은 폭스바겐의 최고급 모델 페이톤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페이톤은 폭스바겐이 대(對)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 만든 폭스바겐의 야심작이었다. 하지만 벤츠·BMW 등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고급차 시장에서 페이톤은 한계가 분명했다. 폭스바겐 경영진은 1년 전 중대한 결정을 했다. 드레스덴 기술경제대에서 개발 중인 전기차 모빌리티 기술을 이곳에서 시연하면서 대량생산에 나선 것이다. 폭스바겐은 오는 2020년 전체 생산량의 25%를 전기차로 채운다는 계획이다. 공장은 거대한 문화예술 공간과 같다. 건물 한편엔 공짜로 전기차를 충전하는 충전소를 갖추고 있다. 충전소의 전기는 바로 옆 태양열 발전판에서 가져온다. 1층에는 그동안 폭스바겐이 시험용으로 만든 전기차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e-골프는 하루 평균 70여 대. 지상 5층부터 1층까지 하나의 제작라인으로 연결돼 있다.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공간은 1층 전시관뿐이지만 e-골프 구매자는 제작라인 옆에서 자신의 차량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기술 협업을 위해 일부 공간엔 5곳의 모빌리티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다.
최근 독일은 정국이 불안하다. 극우 성향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최근 치러진 바이에른주 의회 선거에서 AfD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득표율(10.2%)을 기록했다. 바이에른주는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곳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본사가 많이 위치해 있어 재정자립도도 독일 내 최고 수준이다. 바이에른주마저 극우정당이 기승을 부릴 정도로 독일 정국은 심상치 않다. 현재 AfD는 전체 독일 16개 주 중 15개 주 의회에 소속의원을 두고 있다.
AfD에 대한 인기는 구 동독 지역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유는 메르켈 총리의 이민정책에 불만을 가져서다.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지금의 과실을 난민과 나눠 가지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드레스덴에서 만난 호르헤는 “메르켈의 난민 정책은 완전히 잘못됐다. 오늘날 독일의 성공에 그들(난민)이 기여한 바는 없다”고 비판했다.
최근 독일 내 반(反)난민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켐니츠 살인 사건이다. 지난 8월말 동부 켐니츠에서 한 이라크 태생 난민이 독일인을 살해한 것이 극우 세력의 폭력시위로 이어졌다. 켐니츠는 동독 지역 내 중요한 산업공단. 폭스바겐의 엔진 공장이 이곳에 있다.
동독 재건엔 비단 독일 연방정부만 노력한 게 아니다. 민간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일의 대표 기업 지멘스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기업 11곳을 인수하고 12개 인력센터를 세웠다. 동독 지역 노동자만 2만 명을 고용했다. 드레스덴이 약 27억 마르크(1조4000억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지었다. 그 성과는 오늘날 독일의 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