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18화 -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에 즈음해
11월 11일은 어떤 날일까? 젊은 층에선 친구나 연인에게 ‘빼빼로’ 과자를 선물하는 날을 떠올릴 테고, 농민들은 농업인의 날로 기억할 것이다. 또 이 날 부산에서는 6·25 때 참전한 유엔군 용사들을 기리는 국제추모식이 열리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 날을 특별히 기념하고 있다. 미국은 재향군인의 날로 법정공휴일이고 폴란드에서는 독립기념일 행사가 열린다. 영국, 프랑스, 캐나다에선 11월 11일이 우리 현충일과 같은 '리멤버런스 데이'라서 오전 11시에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올린다. 바로 이 날이 4000만 명 넘는 사상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종전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해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꼭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종전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많은 나라에서 탈식민운동이 펼쳐졌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난 데 이어 이 전쟁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회의 참석 조차 거부됐다.
세계대전 중 조국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적을 도운 '왕따' 군인들
그런데 독립을 청원하러 파리에 온 약소민족들 중에 뜻밖의 '불청객'이 끼어 있었다. 영국 정보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 대령이었다. 옥스포드 대학 역사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지역 전문가로 중동에 파견됐다. 독일 동맹국인 터키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토착부족들을 부추겨 무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한데 그는 의외로 아랍 전사들을 잘 통솔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워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아랍 지도자들과 함께 파리에 나타난 로렌스는 강화회의 내내 영국 정치인들에게 이 지역 독립을 호소하고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급기야 회의 참석도 금지시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영국은 터키군에 맞서 싸우는 아랍 부족들에게 전후 독립을 약속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와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전후 아랍을 분할 통치한다는 '이중 플레이'를 펼쳤다. 게다가 전쟁이 격화되자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중동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도 약속했다. 이런 상반되는 약속 탓에 아랍의 독립은 진즉에 '공수표'가 된 셈이었다. 추악한 뒷거래로 자락을 깔아놓은 파리회의에서 열강들은 중동지역 땅을 나눠 갖기에 혈안이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순수한 열정만으로 독립전쟁을 이끈 로렌스는 열강들에게 거추장스런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파리회의 이후 중동의 지배자는 터키에서 영국과 프랑스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독립전쟁의 영웅' 로렌스 대령은 '제국주의 앞잡이'란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다. 영국 조지 5세를 알현한 그가 왕의 면전에서 기사 작위를 거부하고 버킹엄 궁을 빠져나간 것도 조국에 대한 실망과 자책감 때문이었다. 1922년 34살에 일반 사병으로 '도피성' 입대를 한 로렌스는 자신의 저서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군인이란 자신을 소유한 자에게 육신을 24시간 착취 당하고 정신과 열정을 멋대로 써먹도록 허락한 사람이다"라며 자신의 무기력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몇차례 자살을 기도한 그는 1935년 군복을 벗은 지 두 달 만에 오토바이 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얀마의 로렌스'로 알려진 한 일본 군인의 행적이 눈에 띈다. 동남아 침략을 앞두고 일본은 아웅산을 비롯한 미얀마 열혈청년들을 포섭해 전후 독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공동의 적' 영국을 물리친 후 미얀마 지배자는 영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아랍족에게 써먹은 '가짜 약속'과 판박이었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안 아웅산 장군은 다시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리고 독립 투쟁에 나섰다. 그런데 처음 아웅산을 찾아내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력항쟁을 부추긴 이는 첩보부대장 스즈키 케이지(1897~1967) 대좌였다.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배신자란 오명을 뒤집어 쓸 처지에 놓였다.
이때 스즈키는 미얀마 독립군 대표들에게 "나는 일본 군인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 나를 먼저 죽이고 나가 싸워라" 라고 말했다. 일본의 이쓰미야 타치요가 쓴 《내가 겪은 첩보부대》란 책에도 "일본 점령군 나스 장군이 '반역자'라고 소리칠 정도로 스즈키는 미얀마 독립을 끈질기게 호소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스즈키를 전범으로 체포했지만 아웅산 장군이 강력히 반발해 석방됐다. 1981년 미얀마 정부는 사망한 스즈키를 대신해 그의 가족에게 국가최고훈장을 수여했다.
그나마 로렌스나 스즈키는 끝까지 자국의 군인으로 남았지만 아예 적군으로 돌아선 제국 군인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폰케 프린센(1925~2002)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침략에 대항하다가 붙잡혀 수용소를 전전했다. 전후 군에 입대한 그는 네덜란드가 식민지 영유권을 주장하며 인도네시아를 다시 침략한 전쟁에 투입되었다. 원래 반식민주의자인 그는 1948년 "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항쟁이 옳다고 생각한다. 각 민족은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면서 탈영을 감행하고 저항 게릴라군에 투항했다.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던 저항군도 전황이 불리해지자 '백인 게릴라' 프린센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1949년 네덜란드군이 철군하기에 앞서 그의 부인을 처형하자 그 또한 총구를 조국으로 돌려 동족 군인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같은 프린센의 반역 행위에 대해 모국 법원은 사형을 선고한 반면 신생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해방 후 프린센은 인도네시아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반독재, 반체제 활동으로 수차례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후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던 그는 1996년 '제2의 조국'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하자 이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네덜란드 정부는 "프린센은 영웅, 순교자, 성자는 아니었지만 인권 운동에 헌신한 점은 주목할만 하다"면서 마지못해 그를 사면했다.
이렇듯 세 사람이 이민족의 독립을 도운 이유와 배경은 저마다 달랐지만 철저하게 '현지화'를 꾀한 점은 공통적이다. 요컨대 로렌스는 자신이 쓴 《스물일곱가지 읽을거리》란 소책자에서 "영국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그들의 가족, 부족, 친구, 적, 우물을 꿰고 있을 정도로 그 지역 환경에 푹 젖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자는 2006년 이라크에서 '민심 수습' 작전을 펼치던 미군 지휘관들의 필독서로 활용되었다. 스즈키 또한 미얀마 전통 복장을 즐겨 입고 번개란 뜻의 '모조'라는 현지식 이름으로 불렸는가 하면 신학을 공부한 프린센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현지 여성과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성패는 민중들의 마음을 얻는데 있지 않나 싶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가짜 독립'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 '가짜뉴스'
근대 전쟁이론을 확립한 독일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란 명언을 남겼다. 허나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는 전쟁의 연장선'이란 말이 오히려 어울리는 듯 하다. 요즘 거론되는 '가짜뉴스' 문제 조차 정쟁으로 몰아가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가짜뉴스나 열강들의 '가짜 독립' 약속 모두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거짓 정보다. 전세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이런 거짓 약속에 속아 목숨을 잃었다. 가짜뉴스도 전쟁 못지 않게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증오를 확산시킨다. 이런 속임수로는 민심을 얻기는 커녕 자기 편 마저 등을 돌리기 십상이다.
100년 전 가짜 약속을 일삼은 조국을 등지고 '적과의 동침'을 택한 제국 군인들의 이야기가 이를 웅변한다. 행여 '가짜뉴스' 논란에 이념적 색채를 덧씌워 잇속을 채우려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