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인사이트] 말라리아·결핵 남하로 국내 보균환자 증가세
올 들어 전국적으로 발생한 말라리아 환자는 570여 명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1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우리 보건 당국 관계자들은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걸 ‘북한 요인’으로 꼽는다. 환자가 파주와 고양·김포·양주 등 경기도 서북부의 북한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4개 시·군에서 발생한 환자가 전체의 3분의 1에 달한다. 국내 말라리아 환자는 2007년에 2227명 수준이었지만 2008부터 2011년까지 남북한이 공동방역에 나서면서 2012년에는 542명, 2013년 445명까지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2012년 남북관계가 꼬이면서 증가세를 보였고 2015년에는 699명을 기록했다는 게 관계 당국의 설명이다.
탈북민 따라 결핵도 국내로 유입
우리 보건·의료 관련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또 다른 우려는 결핵이다. 북한에서 결핵이 만연하고 있지만 적절한 의약품이나 치료책이 마련되지 않아 남한으로까지 번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감염 경로는 탈북민으로 지목된다.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기관인 하나원에서 간호사무관으로 근무하는 전정희씨는 지난 8월 세미나에서 탈북민 가운데 81%가 결핵에 감염돼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해 충격을 던졌다. 대한결핵협회와 하나원 측이 3378명(여자 2947명, 남자 431명)의 탈북민을 대상으로 결핵 피부반응 검사(PPD)를 실시했더니, 그 가운데 81%가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반 결핵약으로 쉽게 치료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많다는 것도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1월7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머리를 맞댄 남북 보건 당국 관계자들이 보건·의료분야 협력에 의기투합했다. 양측이 보건·의료 분야 협력이 남북한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전제조건이라는 점에 의견 접근을 이루고 결핵과 말라리아 등 전염병의 진단 및 예방·치료에 힘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날 회담은 지난 9월 열린 평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건·의료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공동보도문에 따르면, 남북한은 전염병 유입과 확산 방지를 위해 서로 정보교환과 대응체계 구축 문제들을 협의하고 기술협력을 비롯한 대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우선 올해 안에 전염병 정보교환이 시범적으로 이뤄진다. 감염병이 남북한 지역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발생하는지 공동 대응체계를 마련한 것이 의미 있는 대목이란 게 회담 관계자의 설명이다. 결핵과 말라리아를 비롯한 전염병의 진단과 예방치료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실무문제를 협의해 나가기로 한 점도 성과로 꼽힌다.
우리 보건·의료 분야 전문가들은 북한이 만성적인 경제난에 시달리다 보니 약품이나 의료 장비가 턱없이 부족해지고 제대로 된 방역체계를 갖출 능력이 없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의료지원을 받아왔다. 메르스와 사스,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국제구호단체와 우리 당국·민간이 약품이나 장비를 지원했다. 긴급구호 형태의 지원이 이뤄진 지 20년이 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게 우리 당국의 평가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은 체제 들어 평양에 일부 특권층을 위한 새 의료시설이 세워졌지만 일반주민들이 이용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란 얘기다. 또 지방의 경우엔 이런 혜택과 거리가 멀다. 경제난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의료보건체계 마비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실제로 수술환자들에게 투입할 마취제나 주요 약품이 없어 고통이 심화되고 수술 후 환자의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국제기구의 보고가 나오고 있다.
김일성의 이른바 의료보건 분야에 대한 교시도 북한을 외딴길로 모는 데 한몫했다. 김일성은 1966년 10월20일 보건성 간부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의학은 예방의학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김일성은 “제약공업이 아직 발전되지 못한 조건에서 약초 재배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면서 “모든 보건기관들에서 약초를 많이 심어 생약에 대한 수요를 자체적으로 보장하라”고 강조했다. 이후 북한은 역량이 부족한 제약공업에 주력하기보다는 약초 재배에 집중했다. 주체노선이 의료보건 분야에 유입되면서 발전에 제동을 건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북한이 이런 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개선책을 마련하거나 외부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 체제유지나 선전을 위한 겉치레식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사례가 바로 ‘국가망신 4대 질병’이란 용어다. 북한은 결핵·간염·성병·정신병 등 4대 질병의 발병률 저하를 위해 도당 교육부를 통해 이들 질병의 북한 내 발병률과 남한에서의 발병률을 수시로 비교·분석하고 있으며, 질병의 북한 내 발병률이 남한 내 발병률 수치를 넘어설 경우 의사담당구역제에 의해 해당 담당구역 의료책임자를 엄중 문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핵·간염·성병·정신병, 국가망신 4대 질병
사정이 이렇게 열악하다 보니 북한은 한국과 서방국가에서 각종 감염병이 번질 때마다 바짝 긴장하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과거 에볼라 사태 때는 해외 순방을 마치고 온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평양 귀환 후 3주간 격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왔던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 일행이 평양 귀환 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아 신변이상설까지 나왔지만 알고 보니 김정은에게 전파될 것을 우려해 일정 기간 접촉을 차단한 것이란 게 정부 당국자의 귀띔이다. 한번 방역망이 뚫리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 의료체계나 방역시설과 장비 등이 열악한 상황이라 자칫 체제유지에까지 비상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북한은 보건·의료 문제까지 대남비방과 체제선전에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메르스 창궐 때는 “남조선에 치명적 메르스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전파되면서 공포와 혼란·침체에 빠져 있다. 부패·무능과 반인민적 통치의 결과”라고 선동했다. 우리 정부가 “같은 민족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을 무시한 비난행위를 중단하라”고 지적했지만 북한의 비방은 이어졌다. 이번 보건·의료 협력 합의를 계기로 북한이 구태를 벗고 주민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적극 나설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