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이름부터 과일·지명 등 사명 다양 기업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 유추 가능
지난해 연말 미국의 한 IT(정보기술)기업 주가가 2700% 이상 급등한 일이 있었다. 크로에(Croe)에서 크립토(Crypto) 컴퍼니로 상호만 바꿨을 뿐인데, 시장이 크게 반응한 것이다. 크립토는 ‘비밀·암호’란 뜻이다. 크립토커런시(Cryptocurrency·암호통화) 즉, 최근 부상한 가상화폐를 연상케 한 덕분에 주가가 반응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이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우리는 크립토에셋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언급돼 있을 뿐 주가가 폭등할 만한 특이사항은 없었다.
이처럼 기업은 유행에 따라 상호를 바꾸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상호는 공유가치 이상의 ‘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창업가들은 상호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 네이밍(Naming)을 한다. 혹여 사업이 잘 안되면 “상호 때문은 아닐까?”라고 생각해서 바꿔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글로벌 기업들의 상호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동전 던지기로 HP 상호 결정
휴렛패커드(HP)의 공동 창립자인 빌 휴렛(Bill Hewlett)과 데이브 패커드(Dave Packard)는 회사 이름을 Hewlett-Packard와 Packard-Hewlett 중 어떤 것으로 할지 결정하기 위해 동전을 던졌다. 서로 양보하다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한 것이다. 맥도날드(McDonald’s)나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도 형제, 혹은 파트너 이름을 묶은 상호들이다. 동업자의 결속을 약속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설립자의 이름을 딴 상호는 자동차와 패션기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쉐보레(Chevrolet)는 카레이서이자 자동차 엔지니어인 로이 쉐보레(Roy Chevrolet)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고 크라이슬러(Chrysler), 페라리(Ferrari), 르노(Renault), 포르쉐(Porsche), 포드(Ford) 등도 모두 설립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일본의 자동차 제조업체 혼다(Honda)와 도요타(Toyota) 역시 이들 선도기업을 미러링(Mirroring)한 이름들이다.
패션기업으로는 Adolf (Adi) Dassler의 이름에서 아디다스(Adidas)가 나왔고 구찌(Gucci), 프라다(Prada) 등도 모두 설립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런가 하면 항공사 보잉(Boeing)도 설립자 윌리엄 E 보잉(William E. Boeing)에서 가져왔고, 유통업체 월마트, 글로벌 물류업체 DHL, 타이어 제조업체 굿이어(Goodyear)와 브리지스톤(Bridgestone) 등도 모두 창립자 이름에서 나왔다.
소스 업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중국의 ‘이금기(李錦記)’라는 브랜드가 있다. 광둥(廣東) 지방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창업자는 1888년 굴 요리를 하던 중 불 끄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졸고 있는 사이 굴이 졸아버렸는데, 그 맛이 아주 탁월해 이를 소스로 만들었다. 이금기는 창업자 이금상(李錦裳)의 이름에 기(記)자를 더해 만들어진 상호인데 기(記)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업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이름을 건다’는 것은 신념(Belief)의 다른 표현이다. 신념은 기업의 비전(Vision)이나 사명(Mission)을 함의하고 있다. 바로 이 신념에서 조직이 미래에 가야 할 길(Vision), 중장기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Mission)이 나온다. IT기업 애플의 신념(Belief)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현 상황에 대한 도전(everything we do challenges the status quo)”이다.
애플을 IT업계의 골리앗으로 만든 이가 고(故) 스티브 잡스다. 그는 상호를 왜 ‘애플(Apple)’이라고 지었을까? 이에 대해 잡스는 생전에 “개인적으로 농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사과를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Apple이 전화번호부에서 아타리(Atari)보다 앞서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타리는 일본 바둑 용어 ‘아타리(アタリ)’에서 따왔는데, 1972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게임 회사로 잡스가 잠시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선도기업인 아타리를 뛰어넘고 싶은 간절함이 녹아든 것은 아닌가 싶다.
과일 이름으로 작명한 기업들은 이외에도 아주 많다. 캐나다의 휴대폰 제조업체 블랙베리(Blackberry)는 제품에 부착된 작은 버튼이 과일 블랙베리의 씨앗과 닮은 데다 검은색이었기 때문에 채택됐다. 영국의 스토리지 전문기업(Strawberry Global Technologies)은 딸기를, 영국의 유명한 IT기업 에이콘 컴퓨터(Acorn Computer)는 도토리를 기업명으로 채택했다. 이후 IT기업들이 과일 이름으로 사명을 네이밍하는 유행을 낳았다. 최근에는 ING생명이 오렌지라이프로 상호를 바꾸기도 했다.
과일 회사라면 주력상품이 과일이기 때문에 당연시되지만, 전혀 관계없는 기술 기반 회사가 왜 과일 이름으로 상호를 지을까? 그것은 기억하기 쉽고 단순하며 친숙하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 콘셉트로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유통업체 까르푸(Carrefour)나 정보통신기업 시스코(Cisco), 노키아(Nokia) 등은 창업 지역의 지명이나 강 이름에서 따왔고, 아수스(Asus)나 쌤소나이트(Samsonite)는 고대 신화나 성경에서 얻은 이름들이다.
발음 편하고 암기 쉬운 상호가 최근 주류
이처럼 과거에는 설립자들의 특별한 신념, 혹은 아마존이나 애플처럼 알파벳의 앞 글자 혹은 발음이 편하고 암기가 쉬운 상호들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에는 소셜미디어 앱 틱톡(TikTok), 미국판 ‘지식인’ 쿼라(Quora)처럼 격음(激音)으로 튀는 네이밍이 이용자들 뇌리에 더 빨리 스며드는 것 같다.
지난 추억이지만 필자도 여러 업종을 창업하면서 상호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국제회의 대행업을 하면서는 ‘대륙 간 지식을 유연하게 판다’는 의미로 셀란디아(Sellandia)로, 무역업을 할 때는 아이들의 기운을 받아 성공해 보겠다며 두 딸의 이름을 조합한 ‘은진교역’으로, 그리고 여러 나라 창업정보를 한데 묶은 포털을 만들어 보겠다며 ‘비즈니스유엔’으로 네이밍했다.
대체로 상호에는 설립자의 혼이 담겨 있다. 소비자들은 그 상호를 보고 설립자의 신념을 유추하거나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을 읽어내기도 한다. 상호는 사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창업가들이 네이밍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