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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요하문명에 관련된 세 가지 의문이 있었다. 첫째, 과연 요하지방을 포함한 한반도 일대에서 세계 최초의 문명이 있었을까? 둘째, 있었다면 그 문명의 주역은 지금 중국인의 조상일까 한국인의 조상일까? 셋째, 만일 한국인의 조상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도의 문명을 건설했다면, 왜 그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의 글에서 충분히 나왔다고 본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 ‘YES’다. 앞서 보았듯이 여러 가지 생태학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한반도는 1만2000년쯤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 세계 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발달된 문명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두 번째 질문, 요하문명의 주역이 지금 누구의 조상이었을까? 최근 속속 발굴되는 고고학적 유물·유적들로 인해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과거 인간들의 교류가 훨씬 활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요하문명에서 홍산문화 직전에 있었던 조보구 문화 유적지에서 벌써 채색토기가 발굴되는 등 중국 문화의 영향이 뚜렷하다. 따라서 지금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DNA의 상당부분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하문명이 지금 어떤 국가 국민의 조상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게 선을 긋는 일이다,  

하지만 요하문명의 주역이 지금 중국인의 조상이냐 아니면 한국인의 조상이냐, 이렇게 이분법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나만 택하라면,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선택은 더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으로 간다. 요하문명 당시 그 지역 주민들이 남쪽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올라간 사람들이든, 아니면 더욱 북서쪽 내륙으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든, 아니면 그 두 계열의 혼합집단이든, 이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확대할 때 중국 동해안보다는 살기 좋았던 한반도 서해안을 택했으리라는 건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요하에서부터 한반도 남단, 그리고 빙하기 직후에는 한반도 남부에 거의 붙어있었던 일본 규슈지역까지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특징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서해안의 생산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세 번째 질문, 우리가 왜 그 사실을 잘 몰랐을까? 이 답은 이 연재를 통해서도 여러 번 나왔기 때문에 아주 쉽다. 역사왜곡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보다 열세에 있었던 과거 1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그리고 짧지만 최근 경험이어서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 선명한 일제강점기 동안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은 주도면밀하고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못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부정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정신을 가진 독자라면 여기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우리 조상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고 중국은 후진지역이었다면 왜 중국이 더 강국이 되어 역사를 왜곡시켜 왔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주 포괄적으로 답한다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우주와 지구의 환경요인이 이 지구상에서 삶의 조건을 규정해왔고, 그에 대응해서 인간의 대응전략이 바뀌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연재에서는 그 중에서도 요하문명과 한반도 문명 사이의 그 오랜 단절에 기여했던 두 가지 큰 사건을 조명하려 한다. 하나는 철기제작 유목민에 의한 요하문명의 붕괴, 또 하나는 백두산 폭발로 인한 동아시아 판세의 역전이다. 먼저 요하문명의 붕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요하문명이란 키워드 자체가 세계의 학계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고, 현재까지 중국에 의해 자료가 독점되어 요하문명을 포함한 중국역사 만들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요하문명의 종말을 논할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정보로도 요하유역의 유적이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급격히 끝나버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엔 이 지역에 고도의 문명생활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일단 한 번의 단절이 생겨난다. 이 단절에는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보아왔듯이, 급격한 기후변화가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 나왔던 요하문명의 기후변화 그래프를 다시 보자. 소하연 문화를 끝으로 요하문명이 끝난 시점인 기원전 1000년 전후 무렵의 기후변화에 주목하자.  
© 사진=이진아 제공
 이 시기는 ‘철기 시대 한랭화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기로서, 온난기의 정점에서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쳤던 시기다. 세계적으로 볼 때는 이 기온 급강하 경향이 거의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250년까지 지속되지만, 요하유역을 비롯해서, 태평양으로부터 난류를 지원받는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기온은 금방 온난화 단계를 회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보다 내륙 쪽으로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빠르게 추워지는 날씨로 인해 무엇보다 심각한 식량부족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 좀 더 기온이 따뜻하고 식량생산성이 높은 곳, 즉 요하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생겨났을 것이다. 요하유역은 북아시아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꿈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기원전 7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6000년 동안, 그렇게 넘보는 이방인들을 잘 제어해서 든든하게 고도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던 요하인들이 기원전 1000년에 와서 무너지면서 요하문명이 끝나버렸을까?  여기에는 기후변화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인간전략이라는 차원이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서쪽으로 철기를 제작할 줄 아는 유목민족의 한 흐름이 요하지방을 공격해서, 흑요석과 청동의 무기를 병용하던 요하문명의 맥을 끊은 것이라고 말이다. 
청동기 사용 인간과 철기 사용 인간의 충돌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소재가 되곤 한다. 그림은 기원전 8세기 경 철기 사용인 스키타이족이 동쪽으로 확산되어가면서 슬라브족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 대한 상상도다. © 사진=Ancient Origins 제공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즉 이란 및 이라크 일대에서 기원전 200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광석은 지구상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지만 문제는 이를 제련하는 데 필요한 나무다. 앞서 길가메시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아나톨리아 지방은 지구상에서 가장 목재가 풍부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빨리 소진되고 회복되기 쉽지 않았다. 철기 무기를 확보해야 할 필요에 쫓긴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동서로 확산되어가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철기문명은 기원전 3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하지만 한반도 철기 문명에 관해서는 최근 점점 더 새로운 면이 드러나고 있다. 두만강 유역 동북부 일대, 즉 ‘부여’라고 불리던 곳에서는 기원전 1000년 무렵, 함경북도 무산과 강원도 홍천에서는 기원전 600년 무렵부터 철기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1100년 무렵에는 철기를 제작하는 인간 집단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아직 이 철기제작인들과 요하문명의 관계는 학문적으로 연구된 바 없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너무 새로운 자료이며, 더욱 새로운 자료들이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추정은 할 수 있다. 비옥한 땅을 기초로 성립한 농경·해양 복합 문명이었던 요하문명의 주역이 식량을 가진 자와 흑요석이라는 무기 소재를 가진 자와의 연합으로 오랫동안 막강한 문명으로 군림해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소외되었던 인간집단, 예를 들면 아무르 강을 따라 연해주까지 이어지면서 형성된 부족연합들은 그 문명과 적대적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이들이 서쪽으로부터 아무르 강 연안을 따라 철기 문명을 가져온 유목민 집단을 받아들여 요하문명의 주역들을 공격해서 쓰러뜨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랭기가 되어 살기 힘들어지고, 문화수준은 낮아도 더 강력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이민족에 의해 터전을 빼앗긴 요하문명의 주역들은 남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고조선 같은 국가를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을지 모른다. 또 요하문명 특유의 문물을 한반도 전체에 전파하는 데도 기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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