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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출신 정·관계 인사 분석…박원순·이재명·진선미·박주민
30돌을 맞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회원 1000명을 넘어섰다. 19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회원 50명으로 시작한 민변이 어느덧 국내 최대 진보 법조단체로 성장했다. 이 기간 동안 민변 출신 대통령(노무현·문재인)을 두 명이나 배출하는 등 많은 성과를 올렸다. 한 민변 소속 변호사는 “군부를 제외하고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한 단체는 민변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민변 출신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 제기됐던 ‘민변 권력화’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올해 신임 민변 회장으로 선임된 김호철 변호사는 “문재인 정부에 민변 변호사들이 많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권력화란 말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시사저널은 민변 출신 인사들 중 현 정부에서 주요한 위치에 있는 10인을 선정해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 박원순 서울시장
민변의 전신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 창립멤버로 1980년대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이기도 하다. 1988년 5월28일 민변이 탄생하게 된 총회 자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연구 발표를 하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민변 창립 51인에 이름을 올렸다. 박 시장은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년간의 연수기간을 거친 뒤 검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1년간의 검사 활동 이후 1983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경기고 선배인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인권 변호에 전념했다.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맡아 변론했다. 조 변호사는 법조인 박원순의 ‘멘토’이자 ‘단짝’이었다. 조 변호사는 1990년 12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장 가까운 동료를 떠나보낸 박 시장은 곧바로 영국으로 떠났다. 조 변호사가 별세 전 “돈은 그만 벌고 외국에 나가 보라”고 권유한 게 계기였다고 한다. 해외에서 돌아온 뒤 박 시장은 1994년 참여연대를 설립했다. ‘한국 시민운동 1세대’ 박원순이 등장한 순간이기도 했다. 총선 낙천·낙선 운동과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 등을 주도했다. 아름다운재단을 만들어 기부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2006년엔 독립 민간연구소인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이렇게 쌓은 명망으로 2012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당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끝에 당선됐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며, 올해 지방선거에서 3선에 올라 여당 내 유력 대권주자로 꼽히고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
이재명 경기지사는 2016년 탄핵 정국의 ‘스타’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게이트가 불거진 와중에 나온 그의 ‘사이다’ 발언은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한몫했다. 지지율이 한때 18%까지 오르며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경선 레이스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올해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당선되며 차기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지사는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을 꿈꾼다. 그는 실제로 변호사가 되기 전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함석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프레스 기계에 왼쪽 손목이 끼이면서 뼈가 골절돼 기형이 됐다. 이로 인해 ‘6급 장애인’ 판정을 받아 군대에 가지 못했다.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한 이 지사는 광주민주화운동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지사는 “광주는 나의 사회의식을 비로소 단련시켰다. 광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한낱 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광주는 나의 구원이었고 스승이었고 내 사회의식의 뿌리였다. 나를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고시 공부에 매진한 결과,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시 동기로는 문병호·최원식 전 의원,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민변 사무총장과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사법개혁담당비서관을 지낸 김선수 변호사 등이 있다. 이 지사는 변호사 시절 성남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1995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된 김태년 성남 미래청년회 준비위원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조사를 받자 “안기부의 이런 수사 태도는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을 강행하려는 비열한 수법”이라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를 즈음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2006년과 2008년 연거푸 낙선한 뒤 2010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4년에도 5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여당 내 대표적인 젊은 여성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3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변호사로 호주제 위헌소송, 송두율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았다. 호주제 위헌소송 공동변호인단에 참여했다.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위원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백인변호사단으로도 활동했다. 진 의원은 30세였던 199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민변 회장을 역임했던 이석태 변호사와의 인연으로 연수원 수료 후 법무법인 덕수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동료 변호사로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있다. 진 의원이 남편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진 의원이 변호사가 되고 나서 호주제 폐지운동에 참여했는데 호주제를 없애자고 하면서 남편을 호주로 하는 혼인신고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남편과 함께 호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정치권에는 비례대표로 입문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19대 국회에서 민주통합당 법률 담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했고, 혈연이나 혼인 관계가 아닌 동거가족 구성원이 기존 가족관계와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게 하는 생활동반자등록법, 국가정보원 수사권 폐지와 국회 통제 강화를 위한 개혁 법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법안, 경찰 물대포·차벽 사용제한 법안 등을 대표발의했다. 20대 총선에서 서울 강동 갑 지역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반 당 적폐청산위원회 간사를 맡아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실정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문재인 정부 2차 개각에서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내정되면서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올해 3월 재산변동 신고에서 마이너스 12억9000만원을 기록, 20대 국회의원 가운데 최하위를 차지했다. 채무만 17억9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세월호 변호사’ ‘거지갑’ 등의 별명을 가진 여당의 국회의원이다. 8월 열린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2012년부터 2년간 민변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변호사 시절 박 의원은 ‘거리의 변호사’로 불렸다. 경남 밀양 송전탑 피해 주민과 제주 강정마을 주민,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공권력에 의해 시민의 권리가 훼손되는 현장에 상주하면서 그들을 위해 일해 온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2009년 야간집회금지 헌법 불합치 판결, 2011년 경찰의 ‘차벽’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14년부터는 세월호 유가족 법률 대리인으로 활동해 왔다. 박 의원은 2016년 더뷸어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당시 입당 인사에서 “결정은 쉽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제 평생 기다려온 순간일까, 아니면 평생 오지 않기를 바란 순간일까 아직도 혼란스럽다”며 “제가 정치인으로 어떤 경쟁력이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제가 해 왔던 활동이, 앞으로의 저에게 순풍이 될지, 역풍이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보통 영입인사들이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지만 그는 서울 은평 갑에 출마했다. 김신호 국민의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추진한 결과, 여론조사를 통해 은평 갑 단일 후보로 확정됐으며, 54.9%의 과반 득표율로 당선됐다.※계속해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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